Dec 022006
 

외상이후에대한
시나리오 <깊은 단색화>로부터

# 13 : 에필로그
에필로그 : 맺음. 극의 마지막에 덧붙여지는 주석, 극에 대한 설명, 폐막사. 프롤로그에 대칭되는 용어.

오늘로 마지막이네요. 아픈 건 많이 좋아지셨죠? 네, 다행이네요.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앞으로 꾸준히 운동하는 거 잊지 마시고, 네, 무리해선 움직이지 마시구요. 수영 같은 거 하시면 좋을 거에요.

얘길 계속 하기로 하죠. 그렇게 그 실험은 끝났습니다. 혜원이와 현우 형,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결국 거기 머무를 수는 없었네요. 나는 결국 그곳으로부터 떠나 새 거취를 찾았고,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가슴아프게도 말이죠.

혜원이를 비롯해, 그 사람들과 정말 긴 시간을 사귀었어요. 인간 대 인간으로써 같이 웃고, 떠들고, 가끔 싸우기도 하고, 술 한 잔 마시곤 맘 속 깊은 곳에 있던 모든 것들을 다 털어놓기도 하고……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렇게 힘겹게 쌓아올린 관계였는데,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어요. 아주 작은 계기 하나로 삽시간에 무너지기 시작하죠. 이 사람이라면 내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괜찮겠다,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거긴 아무 내실도 없었던 거에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우리가 만난지도 벌써 두 달째네요. 두 달동안, 하루에 30분 씩 만났어요. 참 자주 만났네요. 나름 친해지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럼 여기서 궁금증 하나. 현우 형이랑 나는 이 년을 만나고 부대꼈어요. 하지만, 우린 정말 친했던 걸까요? 사실 현우 형이랑 내 관계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정도 관계는 두 달 동안만 만나도 충분히 만들어져요. 같이 웃고, 떠들고, 상담이란 명목으로 맘 속에 있는 비밀까지 털어놓았지만, …… 결과가 말해주듯이, 내실은 없었죠. 의사와 환자, 정말 차갑게 얘기하자면 공급자 대 수요자로 만난 우리 사이도 최소한 그 정도 관계는 된다고 생각해요.

답이 거기 있을지도 몰라요. 우정은 소중하다, 사랑은 보석같다고들 하지만, 막상 친분이란 참 피상적이죠.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은 점 하나, 선 하나에 불과할 거에요. 두 달이면 알 수 있는 아주 피상적인 앎이죠. 거기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에도, 이 년이란 시간이 마치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믿게끔 했기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선입견이 서로를 사로잡게 되었던 것 같아요. 사실 사람이 사람을 사귄다는 건, 마치 탐험같은 것이죠. 무지와 안개 속에서, 앎의 점을 하나 하나 찾아가는 아주 뜻깊은 탐험일지도 몰라요.

앎은 점처럼 얄팍하며, 대신 오만이 그 부족함을 메울 터이니….. 그 오만의 구름이 앎을 대체하였으며, 점처럼 얄팍한 앎으로 무한한 공간과 같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믿었으니…… 그러니 깨져버린 거겠죠. 그렇게 깨져버린 관계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어요. 험프티 덤프티처럼. “Humpty Dumpty sat on a wall. humpty dumpty had a great fall. all the king’s horses, and all the king’s men, couldn’t put humpty dumpty together again.”

앎이 넓어질 수 있다면 참 좋을 거에요. 그럴 수 없다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딱 그만큼의 무지와 안개 속에서 탐험을 하는 것도 좋을 거에요.

우리도, 친구가 되면 좋을 거에요. 안 그래요?

  님이 03:17 에 쓴 글

  2 개의 반응

  1. 이글루에서 돌아다니다가 허지웅씨 블로그에서 이리저리 하다 흘러왔어요.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10화에서였나? 혜원이 클라이막스에 대해 하는이야기 완전 공감 싱크로율100% ^__^
    시간나면 또 읽으러올게요.

  2. 언제든지 오셔서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꾸벅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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