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Marx
프랜시스 윈 지음(1999), 정영목 옮김(2001)
푸른숲.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이 두렵다. 나는 문득, 언제 ‘유신의 퍼스트레이디’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어 이 책을 빨간 색 금서로 지정하고, 졸필로 책에 대한 감상을 피력한 나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구속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에 빠진다. 결코 가능성 없는 얘기가 아니다. 생각컨데, 아마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이나 서울을 향해 선전 포고를 해 올 가능성과 거의 비슷할 것이다. 두려움 또한 딱 그 정도다.
맑스에 대한 21세기 한국의 태도는 비교적 간명하다. 저자의 지적처럼 긴 시간동안 지식인들은 “맑스 극복”을 자칭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자랑으로 삼아왔으며, 특히 오랜 시간동안 새뮤얼슨류의 학설을 바이블로 받들어온 경제학계의 경우 맑스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 없이는 그들의 이너서클에 발조차 들여놓을 수 없었다. 이승만 이래 영미의 것이라면 무조건 훌륭한 것으로 받아들인 한국 사회에서라고 예외가 있을 수는 없었으며, 역시나 이 따라하기 좋아하는 민족은 “자본”을 읽지 않은 사람들조차 “나는 맑스를 극복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거대한 성토의 장(場)을 열었다. 이러한 관성화된 지적 자부심은 그 주름살 속에 수많은 지식과 활자를 박아넣은 한림원의 노장파 학자들로부터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바로 그 가짜 노장파 학자를 받들어 모시기에 여념이 없는 선전꾼들에 의해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변모한다.
이 평전은 수많은 학자들의 맑스에 대한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그에 걸맞는 지적 유희도 즐길 수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독자로서 <공산당 선언>의 등장과 저 유명한 선동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리고 맑스 최후의 집대성 <자본>의 등장에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이러한 예술적 묵시록의 등장이 기막히도록 역설적인 곤궁과 천재 맑스의 괴벽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보며 또 어딘가 모를 허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거기에서 보이는 것은 레닌과 스탈린, 마오의 현실로 재탄생한 “~주의(ism)”가 아니라 온전히 인간으로서 맑스의 모습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신이든 악마든 여하튼 인간 이상의 존재로 부상해버린 맑스를 다시 인간으로 끌어내리는데 전력투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사실 맑스 개인의 ‘평전’이라는데서 이미 읽어야 했을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맑스에 대한 (단 한 번도 맑스의 글을 읽지 않았을지 모르는) 지식인들의 일방적인 “극복”이나 “당위적인 비판”은 사실 한 가지 전제를 깔고 있는 듯하다. 맑스가 인류 사상 가장 완벽한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이며 경제학자였다는 것이다. 맑스에 대한 이러한 비현실적인 기대를 접어놓고 볼 때, 맑스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위대한 사상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잃지 않는다. 묵시록으로서의 의미를 잃었어도 <공산당 선언>은 여전히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팜플랫이며, 그가 지적한 “노동의 소외”는 이제서야 비로소 온전히 와닿는 신자유주의의 낮은 길(Low Road)이지 않은가. 비록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잃을 것들이 사슬 말고도 너무나 많은 시대가 왔다 해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창창(瑲瑲)하다.
(사족) 책의 후반부에서 늙은 칼 맑스는 찰스 다윈과 서신을 교환하는데, 이 서신들 일부는 후일 “다윈이 맑스의 파우스트적 거래를 거부했다”, “맑스는 <자본>을 다윈에게 헌정했으나 다윈으로부터 거절당했다”는 후일의 신화(神話)를 창조했다고 한다. 이 신화는 마거릿 페이의 연구에 의해 사실 맑스의 사위인 브래드래프가 <학생들의 다윈>이란 책을 다윈에게 헌정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한 서신이 후일 맑스의 것으로 오해되면서 생긴 촌극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사소한 서신을, 맑스를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하기 위해 무서운 괴물(신화)로 확대 재생산한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다.
http://yeinz.net/blog/archives/80/trackback

최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