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화번호

KT가 8일을 기해 2G 이동통신 서비스를 중단하려던 데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는 모양이다. 이로 인해 KT의 LTE 사업은 한동안 망조가 들 것이 확실해 보이고, 관련해서 몇 가지 이야기.

KT가 2G 가입자 수를 줄이는 과정에서 ‘속도전’을 벌였다는 의혹은 이제 더이상 의혹도 아니다. 법원은 실제로 KT가 실정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니. 따라서 이런 ‘속도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충분히 정당하고, 이를 이유로 KT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도 당연히 마땅한 일이겠다.

다만 문제는, 자꾸 “내 번호를 왜 기업의 이윤을 위해 빼앗기냐”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심지어는 법정 발언에서도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트위터를 통해서도 이 주장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왔는데, 이는 이 주장의 기저에 ‘사유재산’ 개념의 무리한 확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이 될 수 없는 것(전화번호)을 사유재산으로 여기고 또 그것을 지키려 하는 모양새 때문. 현재로서 다수설은 전화번호가 국가의 자산으로 사용자에게 실체적인 권리가 있지 않다는 것. 실제로 010 통합 정책에 대한 반대의 근거는 “‘내’ 번호를 왜 정부가 마음대로 하느냐”는 논리가 아니라, “왜 실효성 없는 통합 정책으로 국민에게 불필요한 불편을 야기하느냐”는 것이었다. 많은 사용자들이 전자로 곡해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또한 끊임없이 발전하고 다양하게 분화되는 통신 기술에 비해, ‘번호’라는 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앞으로 어떤 기술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01~로 시작되는 번호가 거의 전부 휴대전화에 의해 점유되고 있다는 것. (02, 03, 04 등으로 시작되는 번호 역시 지역번호 등으로 이미 이용되고 있다.) 비유하자면, ‘휴대전화’가 없던 어느 세상에 ‘휴대전화’란 서비스가 나타나서 그 서비스를 시작해야 하는데, 번호 자원이 전부 삐삐 서비스에 사용되고 있어 혼란이 빚어지는 상황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따라서 우리 역시 미래의 어떤 서비스 – 그게 어떤 서비스가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 를 위하여 번호 자원을 어느 정도 효율적으로 통합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

따라서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휴대전화 번호, 통합하지 말자”는 건 대단히 무책임한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번호 체계가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 문제는 그로 인한 다양한 불편과 불만을 얼마나 잘 봉합하였느냐 하는 건데… 여기에 대해서는 정부가 별로 할 말이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 KT를 뭐 잘했다고 칭찬할 생각은 절대 없지만, KT는 지금 그 유탄을 맞고 있다고 본다. 아무리 봐도 KT는 2G 망을 최대한 일찍 닫아야 한다. 4G LTE 서비스로의 이행은 빠르게 이뤄지면 이뤄질수록 좋다. 그러나 KT는 기존 2G 이용자들을 강제로 쫓아낼 수도 없으며, 지금 제공되는 편의 이상의 유인을 기존 가입자들에게 제공하기도 어렵다. 사실 지금 KT가 제공중인 2G → 3G 전환가입 혜택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설득을 통해 일을 해결했다면 쉽게 되었을 걸 KT가 무리를 하는 바람에 일이 더 꼬였다’고 얘기하지만, 글쎄, 과연 이 상황에서 그 ‘설득’이란 게 그렇게 빨리 이뤄질 수 있었을지, 과연 가능하기나 했을지 의문이 든다. “방법은 단 하나, KT가 방통위를 설득해 01X 번호를 쓸 수 있게 하는 것” 같은 여론도 만만찮은 상황에서, ‘설득’을 통해 일을 해결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은 그저 이상일 뿐이다.

내 생각으로는 번호통합 정책부터 시작해 방통위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어차피 2G 서비스 중단은 이뤄질 수밖에 없고, 이때까지 ‘설득’을 통해 2G 가입자들을 3G로 전부 이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2G 서비스 중단을 일찍 승인하되, 그 유예기간을 충분히 길게 두어 이용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거야 뭐 그냥 해 보는 생각이고, 그 높으신 분들 안에서 대체 어떤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을지는 영 모르겠다.

“내 전화번호”에 대한 6개의 댓글

  1. 흥미로운 이슈네요. : )
    특히 전화번호가 소유객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흥미롭습니다.
    “사유재산 개념의 무리한 확장”이라는 지적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데요.

    사소하게 궁금한 건….
    1. “다수설”이 어떤 영역, 어떤 집단에서 논의된 다수설인가요? (법학자들인가요? 정말 궁금..)
    2. 본문에 ‘번호의 공공성'(?)을 설명하고 계시는데, ‘다수설’ 학자들의 논거도 이와 유사한 무엇이겠다 싶긴 하지만, 그 다수설의 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1. 법학자들 쪽이라고 합니다. 실제 판례에서도 전화번호에 대한 재산권은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역시 전화번호가 실질적으로는 유한한 자원이라는 점이 그 근거인 것 같습니다. 이론적으로야 무한하다지만, 누구는 011-xxx-xxxx 같은 번호를 쓰는데 누구는 2001:0db8:85a3:08d3:1319:8a2e:0370:7334 같은 번호를 쓰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따라서 전화번호는 관계법령에 따라 정부에 의해 관리되며, 사용자는 전화번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이용을 목적으로 ‘임시로’ 받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화번호라는 것이 재화나 서비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기 위한 ‘주소’ 개념에 가깝다는 점도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정부가 ‘주소’를 바꾼다고 ‘주소를 강탈당했다’고 표현하기 어려운 것처럼 전화번호 역시 그렇다는 것이죠.

    2. 저도 2차 텍스트밖에 본 게 없어서(…) 관련해서 SKT가 패소한 사건이 있다고 하는데 찾기가 힘드네요. 나중에라도 찾게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죄송

  2. 개인적으로는 정부정책으로 무리하게 010으로 통합을 해서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01x번호로도 3G기기를 쓸수만 있다면 사용자들이 초기부터 더 원활하게 3G로 넘어갔을거 같네요.

  3. 예인님 말대로 전화번호가 공공재 성격을 가진다는 것에 동의하는데요.

    다만 이게 우리나라 다수설이고. 사람들이 이걸 모르고 곡해한다는 식으로 말하는건 좀 너무 교조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네요.

    전화번호를 가지고 영업하는 사람들한테는 그게 재산적 가치가 엄청나게 클수가 있고. 그걸 주장할수도 있는 부분이지..

    단지.그게 재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당신들은 이런 법학지식이 없으므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거야 라고 말할 권리가 생기는건 아닌데요.

    마치 진보먹물들이 라깡이나.. 지젝 읊어 대는거랑 비슷하게 권위적인 태도라서 약간 반감이 생기네요.

    그냥 참고사항 정도로 우리나라 법원의 입장을 거론을 하시면 딱 맞는 태도 같네요.

    법원입장이 어떻든 예원님 주장에도 타당성이 있으니까요. 굳이 다른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되는 문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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