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뉴시스)
몸을 던지는 안마사의 슬픔 (한겨레21)

의학은 잔인하게도, 심심찮게 “불가능”이라고 말한다. 모래 위를 뛰어놀아야 할 작은 꼬마가 간경화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고, 배에 가득 퍼진 메두사 머리를 보면서도 어찌하지 못해 죽음만 기다린다. 겨우 치료가 되더라도 이런 아이의 수명은 어차피 시한부다. “어차피 시한부”, 그 잔인한 선고 앞에서도 의사는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눈물은 절망을 안겨줄 뿐이다. 그렇다고 희망을 보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본능에 따라, 이 불쌍한 아이를 위해 무어라도 해야 한다는 그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장애인들은 “불가능을 말하는 의학”이 만들어낸 비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걸을 수 없다. 볼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복구할 수 없다. 남겨둘 수 없다. 움직일 수 없다. 들을 수 없다…… 수많은 부정 속에 서 있는 그들에게, 그 빈 간극을 메워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의학이 아니라 우리 사회 그 자체다. “걸을 수 없다. 하지만 손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 “볼 수 없다. 하지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희망의 메시지는 의학이 던지는 게 아니라 사회가 던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위대하다는 대한민국은 “불가능을 말하는 사회”로 남으려 한다. “볼 수 없는 자, 일 또한 할 수 없다.” 세상은 “불가능을 말하는 의학”에 한 번 절망한 그들에게 또 한 번 절망을 선물하려 한다.

의사들의 비인간성에 치를 떨던 그 많던 양심적 시민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잔인한 선고 앞에서도 눈물을 삼키고 자신의 인간적 본능[仁]을 일깨우던 그 의사들을 향해 양심 불량이란 선고를 내리던 그 수많은 비평가들은 대체 왜 스위스전의 오심에만 그렇게 목을 매는가? 그들의 마음 속에 가득할 위대한 인간적 본능은, 대체 왜 아직도 깨어나지 않는가? 효율성에 맞서, 직관에 따라, 불가능 대신 “가능”을 향해 세상이 움직이길 바라지만, 꿈은 아직도 너무 먼 곳에 있다. 대체 무엇이 그 본능으로의 회귀를 막고 있는 것일까. “어른다운 생각”의 환상일까, “경제학적 인간”이란 허상일까, “Reds go together”를 외치던 자본 권력일까, 엉뚱한 담론에 열중하는 지식인들일까, 왜곡과 거짓으로 가득한 자칭 정론지들일까……

  2 개의 반응

  1. 모호하던 의식이 보다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할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전부터 하고 싶은 얘기였는데, 아는 게 없어서 감정만 배설할 뿐입니다.

      사실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은 침과 관련해 한의사들과 또 은근슬쩍 직능갈등(??)이 있습니다. 직능갈등이라기보단 사회적 허점인데요. 시각장애인 직업학교에서는 안마와 침술을 가르치는데, 이 중 침술은 제도적으로 의료인의 의료행위로 취급되기 때문에 정작 전문적인 침 시술을 시각장애인이 행할 수는 없다……. 는 거죠. 사실 시각장애인들이 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침술을 의료 행위로 인정하지 않아야 하는데, 제도적으로나 사회적 인식상으로나 그건 불가능하니까요. 제 밥그릇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고. :)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나중에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ㅎ

 댓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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