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림제는 1998년을 끝으로 명맥이 끊긴 전국 한의대생들의 축제다. 1년에 한 번, 전국 방방곳곳에 흩어져 있는 5,000여명의 한의대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단합을 다지고 문화를 즐기던 것이 그 소모성으로 인해 사라졌다가 2006년 다시 부활했다.

실은 1998년 이후로도 전국의 한의대생들은 매 년 한 번씩 꾸준히 모여 왔다. 각 학교 학생회장들의 모임인 전한련 상임위원회를 옹립하고 투쟁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전한련 출범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행림제보다 수 배 더 소모적일뿐더러 시대에도 뒤떨어진 관습에 불과했다. 이 구시대적인 폐단을 없애고 보다 문화적이고 생산적인 행사로 기획된 것이 행림제, 즉 축제의 부활이다.

다시 부활한 행림제는, 기획자들의 생각이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성공적으로 치루어졌다. 참여율은 생각보다 높지 않았지만 참가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고, 나 역시 처음에는 집행부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참여했을 뿐이지만 나중에는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축제를 즐겼다. 무엇이 달랐기에,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기 일쑤였던 출범식이 이렇게 바뀐 것일까.

기존의 “출범식”과 축제로서의 “행림제”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참가자의 주체성에 있다. “출범식”은 지긋지긋한 문화선동 공연, 투쟁사 소개, 상임위 옹립 등 자리에 얌전히 앉아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나마 재미도 없는) 프로그램으로 가득한, 지극히 타율적인 행사였다. 거기에 기획자들은 일정한 선을 긋고 참가자들을 통제했으며, 참가자들은 그 틀에 갇혀 답답해했다. 반면 새로이 부활한 “행림제”의 프로그램은 지극히 주체적이다. 참가자들은 직접 수박 깨기, 요구르트 먹기, 네일아트 등의 다양한 부스를 기획하고 운영했으며, 다양한 문화 행사와 학술 행사를 스스로 선택하여 감상할 수 있었다. ‘가오’ 잡는답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입만 열면 “투쟁”을 말하던 상임위도 올해에는 무대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친근한 이미지로 스스로 탈바꿈했다.

출범식의 타율적인 성격과 행림제의 자율적인 성격은, 놀랍게도 기존 운동권의 모순과 그들의 새로운 지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기존 운동권은 입만 열면 “투쟁”을 소리치며 자신들의 숭고한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려 몸부림쳤다. 사람들은 그들의 권위적이고 딱딱한 모습에 지겨워했고 그 표리부동함에 실망했다. 그런 면에서, 행림제는 운동권의 실패를 극복한 극적인 이벤트라 할 만하다. 타율로부터 자율로, 정치로부터 문화로.

1인당 GDP가 5천 달러를 넘게 되면, 소득 수준의 향상과 의료 서비스의 수준 사이에 상관성이 극도로 낮아진다고 한다. 이 시점을 기해 쿠데타의 성공 가능성이 0까지 극적으로 떨어진다는 이론도 있고, 더이상 경제적인 성장이 삶의 질의 향상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설도 있다.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문화(文化)다. 주체적으로 문화를 즐기는 것, 노래와 춤을, 문학과 쇼를 함께하는 것이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요소가 되었다.

1990년대에 우리나라는 이미 “5천 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하지만 십 수 년이 지나도록 문화는 오히려 쇠퇴해버린 것 같다. 취업 준비에 찌든 캠퍼스, 여전히 투쟁을 울부짖는 운동권, 우리 사이에 문화란 어떤 것일까? 유세에 노래를 동원하고 운동원들에게 춤을 추게 할 뿐, 정작 사람들이 웃고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남겨두지 않는 우리네 정치는, 선거 문화는 진짜 문화적이라 할 수 있을까?

축제가 필요하다. 지금껏 문화를 모르고 살았기에, 그래서 그 겉모습만 흉내낼 뿐 속은 예전의 타율적 정치(政治) 놀음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기에 – 우드스탁이, 진짜 즐길 수 있는 축제가, 꽃으로 만든 폭탄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바꿀 것이며, 정치와 사회, 경제와 문화에 대한 더욱 주체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것이다. 선거도 축제가 될 수 있고, 운동도 축제가 될 수 있다. 어렵지 않다. 한의대생들이 출범식 대신 행림제를 연 것처럼, 우리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다. 그저 지레 겁을 먹고 바꾸지 않고 있을 뿐이다.

 댓글을 씁니다.

다음 HTML 태그 및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trike> <strong>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yeinz.net/blog/archives/59/trackback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 이 사이트의 글은 출처를 명기하여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Suffusion theme by Sayontan Sin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