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 처방전 – 복잡한 현실과 명쾌하지 않은 해답들


‘바로바로의 중얼중얼’이란 블로그에 실린 글을 반박하면서 생각해보게 된 내용인데 하나의 글로 정리해도 좋을 것 같아 글을 따로 쓰게 되었다. “한국의 한의학, 이대로 좋다”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한약도 처방전을 공개해야 한다. 약의 종류, 용량을 모두 명시하게 되는 것이 좋다. 소비자가 한약에 대한 불신을 해소할 수 있을테니 한의사에게도 좋고, 소비자는 약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게 되니 소비자에게도 좋다. 그런데 그럴만한 제반사정이 갖춰지질 않았다. 한의사협회는 특히 현행 한약재 유통 및 관리 체계에 대해 지적한다. 누구나 쉽게 한약을 구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전문적인 지식 없이 한약재를 직접 사다가 한약을 만들어 먹어 여러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처방전 공개는 이러한 한약의 오/남용을 가속화할 위험성이 있고, 한의사는 이런 이유로 처방전의 사본 발급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제반사정을 고쳐나가기가 쉽지 않다. 인삼은 한약인가, 음식 재료인가? 쉽게 생각하면 한약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삼계탕에 들어간 인삼을 한약이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이런 문제를 무시하고 “인삼은 앞으로 한약으로 정해서 모두 약에 준하는 관리를 받는다”고 제도화한다면? “인삼은 앞으로 한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는, 전문의약품에 준하는 관리를 받는다”고 제도화한다면? 무리한 논리인 것은 물론이고 설사 강행한다 해도 당장 인삼 재배 농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힐 것이다.

위의 사례는 차라리 유머러스한 가정에 불과하다. 의료이원화라는 구조적 한계로 인해 의약계에서도 다양한 반발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무리한 반발도 있겠지만 타당한 반대도 많을 것이다. 한약재가 양방의약품(여기에서의 ‘양방’이란 단어는 다만 편의상의 구분을 위한 것이다)에 준할 만큼 규격화될 수 있는가 하는 지적은 대표적이다. 심지어는 무슨무슨침 협회 하는 식의 유사의료인 단체에서도 한의학의 철저한 제도화에 딴죽을 걸 가능성이 높다. 한의학이 제도상의 미비점을 보완하면 보완할수록 유사의료인들이 끼어들 틈은 좁아지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한의학이 제도적으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해서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대로 이것저것 마구 고쳐댈 수 없는 까닭이 이러하다. 이익단체의 간섭도 일부 사이비 집단의 간섭이 아니고서야 밥그릇 싸움으로 매도할 수 없을 만큼 타당한 근거가 다들 갖춰져 있다. 학술적인 논쟁도 많이 끼어들어 있다. 아마 한의학을 규격화된 의학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쟁부터 시작해 해묵은 논쟁거리가 전부 꺼내어질 것이다. 가치의 충돌도 있다. 알 권리와 국민의 건강권이라는 하나의 가치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국민의 건강권과 의료법의 정신 등과 같은 다른 가치와 충돌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문제에서 합의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한약 처방전 공개를 이루어내는 것이 가장 좋은 귀결”이라는 것 정도다. 그 합의가 끝났다면 이제 이익단체의 갈등, 학술적 갈등, 가치의 갈등,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조율해 나가야 할 것이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대강의 조율이 끝났다면 이제 그 공은 입법 집단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다. 이건 긴 시간이 필요하고 또 각론에 대한 아주 심도있는, 전문가들과 시민들의 치열한 논의가 필요한 지점으로, 현직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병아리 수준에 불과한 나는 도저히 끼어들 엄두를 낼 수 없는 지점이다.

현실은 복잡하고 해답은 명쾌하지 않다. 비단 한약 처방전 공개 문제가 특이해서 이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 원래 대부분의 문제가 이렇다. 교조적 태도로 어떤 현실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거친 욕설을 퍼붓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시끄러운 수레는 비어 있기 마련이다. 현실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한 까닭에, 대부분의 경우 쉽게 “이것이 답”이라고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삿대질에 욕설을 퍼붓는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족
그런데 이거 진짜 해결하고 싶은 문제인데, 어떤 돌파구가 있을지 통 감이 안 잡힌다. 진짜 어렵다.

(추가) 사실 글을 쓰면서 많이 고민을 했는데 역시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무슨 얘기를 첨언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간단하게 쓰자면…… 이 문제는 다시 강조하건데 아주 어려운 문제고, 의학과 한의학이 나누어진 의료이원화라는 한국의 실정상 일원화(의학과 한의학을 한 사람의 의사가 맡는 것)의 길을 채택한 중의학 제도와 단순 비교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의사의 업무영역과 한의사의 업무영역은 매우 다르다. 제도적 지향이 다르다. 중요시한 가치도 다르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처방전을 발부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는 좋은 얘기지만, “처방전을 공개하는 중국이 더 선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노골적이며 의도가 의심되는 비약이다. 부디 기우이길 바라지만, 이 글이 그런 논리의 비약을 위한 근거로 악용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한약 처방전 – 복잡한 현실과 명쾌하지 않은 해답들”에 대한 5개의 댓글

  1. 핑백: 正中龍德
  2. 일단 중의학이 한국과 달리 서양의학과 일원화(의학과 한의학을 한 사람의 의사가 맡는 것)를 했다고 말한것은 오류입니다. 중국도 한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서의가 있고 중의가 있고 명확하게 그 역할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업무영역은 한국에 비해 유연하고 서로 협조적일때가 많은것 같습니다. 중의사가 판단해서 서양치료가 필요하면 그쪽으로 트랜스퍼하고, 서의가 중의치료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중의사에게 보내는 이런식이지요. 이럼 불필요한 진단이나 경쟁 이런게 벌어지지 않겠지요. 한국도 면허따고 해당업무에 종사하지 않고 몇해가 지나서 복귀하면 새로 면허를 취득해야 하는지요. 중국은 의사의 면허증도 면허기간이 있습니다. 2년내에 병원에 등록(취직)하지 않으면 새롭게 따야합니다. 2년이 지나도 개원(이런개념은 한국과 좀 다릅니다만)하거나 취직하지 못하면 몇개월간의 보수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3. 잘못이 사실이라면 죄송. 중의대에서 유학중인 분이니 중국 의료제도에 대해서는 더 잘 아시겠지만…

    고대 의대 의학교육학교실에서 나온 < 한국 중국 일본 의사 양성과정 비교 연구>라는 논문에 따르면 “중국도 과거에는 중국전통의과대학이라는 별도 제도를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중국의학과 서양의학에 대한 표준화 작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의사 면허에도 차별을 두지 않아, 양의든 한의든 의사라는 하나의 직종으로 통일하여 의사양성제도를 일원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술하고 있는데요. 중의학 유학생 커뮤니티에서도 의학/전통의학 면허에 구분이 없다고 얘기하고 있구요. 이게 대충 2000년을 즈음해 일어났던 변화로 알고 있고 중국에서 시행된 첫 국가 공인 의사시험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당 논문에는 “이전에는 의과대학 졸업 후 해당 지역 보건부에 등록하면 진료를 할 수 있었기에 의료 서비스의 질이 보장되지 못했다”는 서술도 있네요. 아마 말씀하신 면허갱신제 도입도 같은 맥락, 혁명적 변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한데요. 이것이 잘못된 서술이었나 궁금합니다.

    사실 뜬금없이 도중에 면허 갱신 제도 얘기가 나오는 까닭은 알 수 없네요. 뭐 단순히 사실관계를 물으신 거라면, 현재 한국은 종신면허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국회에서 면허 갱신 제도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나오고는 있습니다만 의료계에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1. 중국은 의사면허시험을 집업고사라고 하는데 여기에 분명하게 중의사와 서의사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응시할수 있는 자격도 중의사는 중의약대학 졸업자구 서의사는 의과대학 졸업자만 가능합니다.(물론 중국의 의료인 양성제도는 대학만 있지는 않습니다. 중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경험을 쌓으면 의사가 될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아마 교육과정내에 서의학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중의사가 서의사식의 처방(예를 들면 굳이 침안맞고 아스피린 먹으면 되는 환자가 있다면 아스피린 처방을 하는것등)도 가능합니다.

      서양의학을 많이 교육시키는것에 대한 반성으로 중의사의사자격시험에도 황제내경,상한론등의 경전과목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에는 설득력을 얻고있고 이런방향이 검토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면허문제도 상식인이 보기에 한국보다 중국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에서 궁금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2. 집업고사에 대한 기존 논문의 설명이 틀렸다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의사면허갱신제의 합리성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제목과 요지로 갈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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