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경기도 어느 지역인가의 한 수능 시험장. 외국어 듣기평가가 시작되면서 천 단위 수험생들이 패닉에 빠졌다. 우리말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방송상태가 조악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평소 총 열 일곱 문제 중 열 네다섯 문제는 족히 맞추던 어떤 학생은 거기서 정확히 열을 뺀 네다섯 문제만을 겨우 맞췄다. 문법 문제까지 어렵잖게 풀어 모두 맞춘 한 학생은 듣기에서만 다섯 문제를 틀렸다. 그 다섯 문제가 그 학생이 외국어 영역에서 틀린 문제 전부였다.

후에 알아보니 그 수능 시험장 – K 고등학교 – 는 거진 일 년 째 방송 장비가 고장 상태였다고 한다. 학교 시험이나 모의고사 때는 별도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교실마다 비치하여 시험을 치렀다고도 했다. 돌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교육청 등에 전화를 걸어 당장 책임자를 징계하도록 요구했다. 그 많은 학생들의 앞날이 고작 기계설비 하나 때문에 망가졌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내 징계 요구를 끝까지 들은 뒤 나의 소속과 이름을 요구했다. ‘행정상의 절차일 뿐 학생에게 불이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다짐을 몇 차례나 받은 후 소속과 이름을 대고 전화를 끊었는데,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교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교무실에 불려가 훈계를 듣고 온 뒤 나는 다시 교육청에 전화를 걸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비난을 토해냈고, 훗날 결국 해당 수능시험장의 교감이 징계를 받았다는 소문을 전해들었다.

그처럼 절망과 분노가 지배했던 학교 분위기는 의외로 수 일만에 가라앉았다. 하기야 원래 그런 법이다. 체험학습이란 명목으로 스케이트장과 롯데월드, 무슨 인체의 신비전 따위에 놀러다니다 대학교에 합격했고,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했다. 2002년의 수능과 2003년의 대학교 입학, 2009년의 대학교 졸업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정말 많은 일들이 변했다. 나는 지금 한의사로 일하고 있고, 참담함과 분노가 뒤엉킨 그때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정말 잘 살고 있다. 외국어영역 듣기평가가 그 많은 학생들의 앞날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누구의 인생도 망가지지 않았다.

수능에서 십 점 이십 점씩 점수가 낮아지는 게 인생의 방향을 바꿀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수많은 어른들이 정말 그런 것처럼 고달픈 고교생들을 압박하고 협박하며 어른으로서의 우월감과 자존감을 만족시키고는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살다보면 수능보다 힘든 일들이 많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고교 생활이 즐거웠다는 헛소리도 많지만 그 역시 어른들의 괜한 잘난척에 불과하다. 10년이 젊어져도 나는 고교생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춘기는 괴로운 시기고, 수능은 끔찍한 관문이며, 고등학교란 곳은 힘들고 짜증나는데다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최악의 환경이다. 그걸 미화할 까닭도 없고 어른으로의 삶이 훨씬 힘들다며 같잖은 잘난척을 할 필요도 없다. 수능을 이겨낸 모든 고 3 수험생들은 이제 겨우 사람다운 삶을 살 기회를 얻었다. 수능시험장에서 나온 고 3 수험생들의 감정이 어떠했든간에, 채점 후 든 생각이 어떠했든간에, 성적표를 받아든 뒤 세운 목표가 어떠했든간에, 앞으로 당신이 살아갈 인생은 적어도 당신의 생각보다는 훨씬 즐겁고 신나는 것이다.

1줄 사족
그냥 위로해줄려는 말이 아니라 이거 진짜임

  8 개의 반응

  1. 워~워~워…
    군대…가 남아 있습니다.(남자 사람들에게는 -_-)

  2. 정말 한마디한마디가 공감가는 글이군용

    특히 인권이야기는 ㅋ 고등학교때 학생주임을 생각나게 합니다ㅎ

  3. 고교시절은 재밌기도 했고 끔찍하기도 했고. 난 둘돠~ ㅋ
    하지만 시험의 압박은 정말 다시 돌아가기 싫다능.
    그나저나 정말 전화해서 따졌단 말인가! 좀 간진데? ㅋ

  4. 난 고딩때 다른 얘들과 비교하자면, 상위 0.1% 안으로 재미있었는것 같다ㅋㅋ
    기회로만 되돌아 보자면.
    고교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많을꺼다 ㅋ
    그런 의미에선 넌 성공한 인간임 ㅋㅋ

  5. 요즘 대학원 진학 문제로 고민하던 찰나에.
    참. 아름다운 글이 아닌가 싶다.
    현실에 부딪혀 좋고 나쁜것 중에 고르는 선택은 어느 것이든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것 같애~ㅎㅎ

  6. 참 좋은 글이군요. 무엇보다 현실을 정확하게 짚은…. 이것이 ‘현실’인데 고교 시절에는 시험 이외의 것은 모두 ‘위안 거리’ 이야기로 들리죠.

    • 선생님께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신 것 같습니다. :) 사실 선생님, 선배님들이 보시기에는 조금 주제넘은 글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는데 감사합니다. :)

  7. 그러고보니 남자사람에게는 군대가 있군요 -ㅁ-;;

    저런건 따지지 않으면 안 바뀌는 법이죠. 어차피 수능 끝난 고 3이란 고삐 풀린 망아지같은 존재라 두려울 것이 없다능.

 댓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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