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CT와 느슨한 인과를 통한 한의학의 검증 가능성

어떤 한의사들은 한의학이 수백 년간 쌓여온 경험이 축적된 의학이므로 안전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는데, 이런 논리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과거의 의안(醫案)은 통계적 방법론이 존재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령 혹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만 뽑아내 의안을 만들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런 문헌들은 낮은 수준의 근거로 활용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한의학이 완전히 안전하다는 근거로 대기는 어렵다.

따라서, 의학계에서도 전폭적으로 신뢰할 만한 연구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의학계와 마찬가지로 무작위 통제 실험을 시행하여 그 효과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혹자는 한의학에서도 RCT를 수행하면 될 것을 한의학계가 그 결과에 자신이 없어 이를 회피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시보나 대조군의 설정이 현대의학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한의학에서 신뢰할 만한 무작위 통제 실험을 수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RCT 설정이 쉬운 편일 것으로 생각되는 침구학만 해도, ‘슈트라이트버거 니들(Streitberger Needle)은 완전한 위약침(Placebo Needle)인가’ 혹은, ‘경혈이 아닌 자리에 침을 놓은 환자군을 대조군으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같은 문제에 대해 아직 정확한 해답이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궁극적으로 그 해답이 제시될 수 있는지조차 의문시되는 형편이다.

이러한 추론을 가능케 하는 가장 명확한 근거는 위약침(Placebo Acupuncture)에 대한 논문들이다. 실제 뛰어난 위약침(Placebo Acupuncture)라는 평가를 받은 슈트라이트버거 바늘(Streitberger Needle) 마저도 아직 완전한 위약침(Placebo Acupuncture)라 말할 수는 없다. 해당 논문의 1저자 Streitberger K. 역시 논문 초록에서 ‘침 연구가 당면한 문제는 대조군의 개념에 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슈트라이트버거 바늘을 시술한 이들을 대조군으로 설정하는 것 역시 완벽한 실험 설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footnote]Introducing a placebo needle into acupuncture research. K Streitberger, J Kleinhenz. The Lancet – Vol. 352, Issue 9125, 1 August 1998, Pages 364-365.[/footnote]

또 현재 행해지고 있는 한약에 대한 연구는 흔히 ‘알츠하이머 병에 대한 총명탕의 효과’ 같은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런 방법으로는 변증(辨證)을 중요한 특색으로 하는 한의학의 효과와 부작용을 제대로 검증했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현대의학의 연구 방법과 차별화된 방법이 필요하다. 한의학의 내부 체계에 입각하여 실험을 설계한다면 ‘중기하함증에 대한 보중익기탕의 효과’같은 제목의 논문이 쓰여질텐데, 이를 무작위 통제 시험으로 검증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중기하함증이 무엇인가, 중기하함증이 호전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등이 서양의학적 용어로 정리되어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는 해석은, 방법론적 과학주의는 반드시 존재론적 과학주의에 의존적이라는 것이다.[footnote]의료 일원화 논쟁의 관점 찾기. 최종덕. 소나무 사 출판, ‘한국 의료 대논쟁’ 중[/footnote] 이미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존재론과 그 서술 방식이 상이한 상황에서, 서양의학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방법론으로 한의학의 검증을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로 인한 한의학의 이론이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던 이유는 ‘그 치료에 유효성이 있다’는 사실이 사회 일반에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footnote]한의학의 과학 콤플렉스. 최종덕. 과학사상 제47호. 2003. 11[/footnote] 이는 인과성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도 인과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원인과 결과 사이, 증상과 원인 사이의 직접적 기술이 당장은 어렵다고 하여도 인과관계는 존재한다는 의미이다.[footnote]상동[/footnote]

물론 이러한 우회적 인과, 느슨한 인과가 한의약의 효과를 완전히 검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의안(醫案) 등이 있다고 하지만 이 또한 정밀한 통계적 자료로서 이용되기는 어렵다. 다만 기존의 RCT나 세 팔 실험, 이중 맹검 실험 등을 완전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한의학의 특성상, 이러한 느슨한 인과관계를 어떻게 자료화할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고민은 일종의 차선책으로 의미를 갖게 된다.

현재 한의학은 높은 단계의 근거는 물론, 케이스 리포트 등의 숫자도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물론 학계를 중심으로 여러 텍스트가 발표되고 있으나 그 수가 충분하다고 보긴 어렵다. 이름 있는 임상가들 역시 자신이 시행하는 치료법이 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하지만 이를 논문으로 발표한 경우는 드물다. 많은 논문과 많은 자료를 통한 EBM으로의 발전 없이는 한의학을 느슨한 인과만으로 변호하기 어렵다.

또한 느슨한 인과의 측면에서, 한약에 합성약과 같은 수준의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적으면 단일 성분으로까지 구성된 합성약과 달리 다양한 성분에 의한 복합효과를 특징으로 하는 한약은 그 정확한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어렵다. 또한 황기, 인삼 등 유명한 한약재들은 식품으로도 이용되고 있고, 실제 많은 한약은 보약(補藥)의 개념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런 약물에 대해서는 메커니즘과 효과, 부작용에 대한 정확한 연구를 요구하기보다, 식품과 합성약의 중간 수준에서 느슨한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이런 논리는 한의학 전체에 검증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곡해될 소지가 있고, 기존 한의학에 없던 새로운 치료법을 도입하면서도 검증을 거치지 않는 폐단을 낳을 수 있다. 따라서 마황, 주사 등 한의학적으로도 기미(氣味)가 강하다거나 독성(毒性)이 있다고 알려진 약물, 또한 부작용이 보고된 약물 등에 대해서는 그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면밀한 검증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당뇨병처럼 지속적으로 악화될 수 있는 질병이나, 암과 같이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질환, 전염병 등에 대해서는 더욱이 그 검증이 시급하다. 이들은 빠르고 확실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생명과 건강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질병들이므로, 만일 한의학적 치료법이 서양의학적 치료법에 비해 치료효과나 부작용 등의 측면에서 열등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윤리적 문제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연재 : 새로운 한의학상의 정립이 필요하다
(2) RCT와 느슨한 인과를 통한 한의학의 검증 가능성

“RCT와 느슨한 인과를 통한 한의학의 검증 가능성”에 대한 3개의 댓글

  1. 실험의 설계는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한의학에서는 더더욱 그런 부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글 내용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연재로 쓰시는 것 같은데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한의학과 EBM에 관해 전에 썼던 글 트랙백 남겼습니다.

  2. 나름 연재이긴 한데….. 한의계 외부보다는 내부의 시선을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변명이나 비약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그건 그렇고 레퍼런스가 많은 글인데 블로그에 붙여넣는 과정에서 레퍼런스가 다 지워져버려서 우선 레퍼런스부터 복원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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