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페미니즘은 이미 대세입니다

‘그’ 페미니즘은 이미 대세입니다. 그런데 그게 긍정적인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1.

숙명여대 총학이 김순례 자유한국당 의원의 5.18 망언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가 학내 반대에 부딪쳐 철회했죠. 그런데 이 반대의 이유란 게 좀 난감합니다.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말라는 주장은 그렇다 쳐도 말이죠… “동문 규탄으로 숙명여대의 대외적 명예가 실추됨”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도덕적 검열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일조함” “숙명여대 내의 여성 네트워크 형성을 저해함”… 나름 미사여구를 동원해 꾸몄음에도 참 난감한 얘기들입니다.

미사여구를 걷어내고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이런 얘기죠. 설령 어떤 권력자가 소수자에 대한 망언과 차별을 일삼는 극우적인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가 여성인 이상 그를 도덕적으로 검열해선 안 되며, 여성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그의 권력을 공고히 지켜야 한다는 것.

사실 색다른 주장은 아닙니다. 인터넷 일각에서 회자되는 여성의 ‘야망’ 담론의 연장선상이기도 하고요. 워마드같은 극단적인 사이트나 트위터 일부 등 서브컬쳐 쪽이야 그러려니 해도, 여성시대처럼 수십만 회원을 보유한 대형 사이트에서도 흔히 보이는 주장이죠.

다만 이 사건이 흥미로운 것은, 중운위에서 학내 여론을 취합한 결과 이런 의견이 ‘다수’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겁니다. 이게 더이상 워마드나 트위터의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주장이 아니라는 거죠. 숙명여대는 정치적 성향을 갖고 모인 집단이 아닙니다. 정치적 성향, 가치관을 특정할 수 없는 다수의 모임이에요. 그런 불특정 다수의 집단에서 다수를 점할 정도로 ‘그’ 페미니즘의 세가 공고하고 강력함을 의미합니다.

2.

그럼 이 문제가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훈수를 둘 만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운동의 향방이란 참 짐작도 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로 인해 풍향이 확 바뀌어버리고는 하니까요. 다만 제 개인의 의견을 굳이 밝히자면, 결국 좌충우돌해도 여성 인권 자체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요.

사실 페미니즘이란 건… 단어일 뿐이죠. 복잡한 맥락이 담긴 사회학적 단어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두고 ‘그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거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차별주의자’라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다… 좀 부질없는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서로 다른 뜻으로 쓰면서 상대를 공격하는 데 이용하죠.

페미니즘이 성별과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우리 모두는 페미니스트여야” 하는 게 당연하겠죠. 하지만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여성의 인권만을 위한 운동이며 이를 위해 성소수자 등 약자를 배척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여서는 절대 안 될 것이고요. 혹 그 모든 사상을 모두 품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면, “우리 모두는 페미니스트”이면서도 또 “어떤 페미니즘 운동에 반대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죠.

그러니 중요한 건, 이게 페미니즘인지 아닌지, 이게 페미니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게 맞냐 틀리냐 하는 걸로 충분하겠죠.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그저 본질을 흐릴 뿐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3.

여성혐오는 있지만, 남성혐오는 없다는 말이 있죠. 사실 매우 나쁜 말이라고 생각해요. 나쁜 가치판단을 담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 또한 그저 학자들이 만든 단어일 뿐인데, 단어가 현실의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는 점에서요.

풀어서 얘기하자면 이런 얘기죠. 학자들은 여성을 타자화하는 사회적 현상을 미소지니라고 부르기로 했고, 이것을 여성혐오라 번역하기로 했어요. 즉 여성혐오란 단순히 여성을 혐오하는 현상 그 자체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지 않은 존재로 보는 사회적 시선을 일컫는 단어죠. 만일 어떤 여성들이 남성을 혐오한다 하더라도, 이건 말 그대로 ‘남성을 혐오하하는 현상’일 뿐, 사회학적 단어 ‘미소지니’의 번역어인 ‘여성혐오’와 같은 맥락의 단어는 아니에요.

… 라는 얘기를 “남성혐오는 없다”고 퉁쳐버리면 어떡하나 싶어요. 그건 아는 사람들끼리의 이야기죠. 아는 사람들끼리야 이렇게 얘기해도 문제가 없지만, 대중을 상대로 하는 글이나 말에서도 이렇게 퉁쳐버리면 좀…

흥미로운 건, 일각에서는 “남성혐오는 없다”는 말을 정말로 남성은 혐오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왜곡한다는 건데요. 예를 들어 대한항공 조현아 씨의 남편이 가정폭력을 고발했을 때, 트위터 등에서는 오히려 그 남편을 ‘도미조림남’이라 조롱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남성이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심지어 나름 이름있는 평론가나, TV에도 자주 나오는 성공한 요식업자조차 2차 가해에 신나게 동참하더군요.

이것도 단어가 현실을 규정하는 경우라 볼 수 있을까요? 어쨌든 전 식자들이 백래시를 ‘강화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어쩌면 그 식자들이 백래시와 공생관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여성혐오’와 동등한 맥락에서의 ‘남성혐오’란 단어는 없다, 이 말은 분명 맞는 말일 거에요. 하지만 그럼, 동등하지 않은 맥락에서, ‘남성을 혐오하는’ 현상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여성의 인권을 위해 소수자를 혐오하고, 5.18 망언을 변호하는 걸 두고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동안에는 그게 ‘극히 일부의 목소리일 뿐’이란 이유로 덮어둘 수 있었지만, 그게 다수의 의견이 된 지금에 이르러선 여기에도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진지하게 비판해야 할 때가 되었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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