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언론과 한나라당, 이명박 당선인은 수도 없이 ‘시장 경제’란 말을 반복한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이 노동의 유연화다. 노동자 해고가 어려워 노동 시장이 경직되어 있으니, 고용과 해고를 탄력적으로 할 수 있게 하여 노동 시장을 효율적으로 잘 굴러가게끔 하자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노동자의 해고를 최대한 틀어막는 좌파적 정책을 가리켜 이렇게 얘기한다. “꿈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시궁창.” 실제로 노동 시장이 지나치게 경직되면 실업률 상승이나 실업자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 악화 같은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랜드 사태는 대표적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것이 정말 시장 경제일까. 고용과 해고에 대한 규제를 푸는 것만이 정녕 능사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만두려면 1억 내라” 택배기사 노예계약>이라는 제목의 SBS 뉴스를 보자. 부득이한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게 된 택배 기사가 남은 계약기간 동안의 영업 손실분 1억여원을 물어내야 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다. 처음 계약을 할 때부터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계약서가 짜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계약을 할 때 계약서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노동자의 잘못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노동자는 그것이 불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노동 계약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소득 전부를 걸고 있는 반면 사용자는 공급의 일부를 걸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가 근본적으로 약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또 노동 시장에서는 마찰적 실업에 의해 발생하는 자연실업률(케인지언의 NAIRU)이 있을 뿐 아니라, 현실 경제에서는 보통 자연실업률 이상의 실업률을 보게 된다. 노동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대처리즘(Thatcherism)의 실패로부터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대처 정부는 강력한 긴축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은 대신 실업률을 크게 높였는데, 이론상으로라면 이 실업률은 조정 후 자연실업률 수준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일단 한 번 해고된 노동자는 다른 직업을 가질만한 노동생산력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업 상태와 취업 상태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노동자는 사고 실험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인 것이다.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일갈 역시 아직 유효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노동자들의 담합은 아주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방에 훤하게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여론의 비난을 받는다. 반면 사용자들의 담합은 늘상 일어나는 일이지만 밀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론의 비난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이는 사용자(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노동 계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즉 사용자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늘상 계속되는 담합을 통해 계약 조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꾸밀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단합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계약 조건을 사용자에게 요구하기는 아주 어렵다. 노동 시장에서는 시장 최대의 적, 담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단체교섭권 등 노동 3권은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단순히 ‘규제를 푼다’는 것이 노동 유연화를 위한 접근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위의 기사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경영자(이자 사용자)들은 신제품 개발에 실패한 노동자 임예인을 아무때고 해고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있을 뿐, 신제품 개발에 성공한 노동자 임예인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직장으로 이직하는 것은 허용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불리한 입장을 생각해 볼 때, 완전히 정상적인 노동 시장 속에서도 엔간한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고서는 사용자와의 노동 계약에서 유리한 입장을 점하기는 어렵다. 즉 내가 ‘노동 유연화’란 주제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스티브 잡스나 조너던 아이브, 진대제가 아니라 보통 샐러리맨 임예인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직장을 옮겨다닐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느냐, 그런 일이 가능하냐 하는 점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상 노동 문제에 함부로 ‘시장 경제’란 이름을 붙이기는 좀 낯부끄럽지 않을까.
2 개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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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합니다. 고용시장에서부터 불평등한 관계에서 시작된 노사관계는 근로중에도, 퇴직할 때도 불평등한 것 같습니다… 진정한 노동유연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심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런데.. 기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수익 창출인데 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감하면서도 능력저하를 보이는 노동자들을 끌어안고 가야할 의무가 있는걸까요?
이 글이 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http://yeinz.net/blog/529
기업의 목적이 이윤 추구라는 것은 기업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기업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요. 기업을 제 하고 싶은대로 놔두면 이윤 추구를 위해 노동자들을 마구 해고하고 불평등한 고용계약을 맺기 쉽상이니 사회의 후생을 위해 이를 컨트롤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 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