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천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송유근 씨의 실패

(한국일보 칼럼의 초안 역할로 쓴 글로, 칼럼 발행 후 슬로우뉴스에도 발행 예정입니다.)

흔한 얘기입니다. 한국에선 아인슈타인이 태어나도 고졸 학력에 발목잡혀 중국집 배달부나 하고 있을 것이고, 뉴턴은 왕따가 돼서 학원강사나 하고 있을 것이고…  한국의 영재/천재교육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거죠.

중앙일보가 송유근 씨의 군 입대 소식을 전하며 또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사 소제목부터 “과학영재 한 명도 못 품는 한국 교육시스템”인데요.

실제 상황은 좀 다릅니다. 송유근 씨는 박사 학위 논문 최종 심사에서 불합격했는데, UST 관계자에 따르면 그 이유가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등 기본적인 것을 갖추지 못해” 서라고 합니다. 굉장히 완곡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수준이 안 됐다는 걸 적나라하게 말한 겁니다.

송유근 씨의 가족은 여전히 “유근이는 여전히 일본에서 공동연구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외국에서는 가능성을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리 신뢰하기는 어렵습니다.

송유근 씨는 지난 번에도 제 1저자로 참여한 논문이 표절 시비에 시달린 끝에 철회된 적이 있는데요, 표절 시비보다 뼈아픈 건 철회된 이유였습니다. 2002년 출판된 박석재의 프로시딩과 겹치는 부분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었지요. 박석재는 송유근의 지도교수이기도 했습니다. 미국 천문학 협회는 해당 프로듀싱과 송유근의 논문 사이의 차이가 변변찮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결국 송유근 씨는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증명해보인 적이 전혀 없는 셈입니다.

 

한국 영재교육의 실패

한국의 영재교육 대상자 수는 대략 12만 명, 초중생(약 6백만 명)을 분모로 보면 2%, 전체 학생을 부모로 봐도 1%를 초과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미국 등과 비교하면 여전히 적지만, 추세를 보면 꽤 가파른 상승세인데요.

하지만 그 성취는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영재교육은 당장 성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이상의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관찰해야 하는 것이죠. 다만 학업성취도 국제 비교 연구 등을 보면, 수학 등 분야에서 상위권의 성취 수준이 오히려 떨어진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것만으로 성취를 부정할 순 없습니다만, 실제 영재교육 현장을 들여다봐도 부정적인 징후가 관찰됩니다.

영재를 선발해 성장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영재교육원’이 고교 및 대학 입시에 활용하기 위한 스펙, 코스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서울대에 가려면 특목고에 가야 하고, 특목고에 가려면 영재교육원에 가야 한다는 거죠. 그러다보니 ‘영재교육원’ 입시를 준비하기 위한 선행학습과 사교육이 횡행하고 있고요. 구글에 ‘영재교육원’을 검색해보면 제일 위에 뜨는 연관검색어가’ 기출문제’와 ‘자소서’입니다. (정작 마땅히 도움되는 자료가 검색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만.)

 

한국 교육 전반의 실패

사실 한국 영재교육 정책에만 혐의를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이건 결국 한국 교육의 총체적인 문제가 영재교육에서도 터져나온 것이니까요. 좋은 대학, 좋은 스펙을 향한 무한 입시 전쟁이 존재하는 이상 영재교육만 갑자기 무릉도원을 걷는다는 것도 이상하죠.

입시제도를 바꾸면 해결될 수 있을까요? 수능은 문제의 질도 뛰어나고 극도로 객관적인 평가 방식이지만, 당연하게도 사교육 등으로 시험을 잘 준비한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을 고착화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비객관적인’ 정성평가, 예를 들어 학종을 확대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더 평등하고, 더 다양하게 학생을 선발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 교육계의 신뢰도가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는 게 문제겠죠. 비리가 끼어들기 너무 쉬운 구조고, 마침 잇따른 학교 시험 비리 사건이 터져나오고 있고요.

제도의 변화는 사회를 이끌어갑니다. 입시 제도도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입시 문화를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얼마나’ 변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건 제도보다… 사회 전체가 강박관념에 휩싸인, 일종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사회 문화적인 환경에서는 대학을 평준화해봤자 그랑제꼴을 향해 정신나간 투쟁이 벌어질 뿐이란 거죠.

 

‘주입’과 ‘집착’, 그리고 ‘여유’

그 병리현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많은 사람들은 ‘주입’이나 ‘줄세우기’를 얘기하지만… 전 어쩌면 ‘집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 말이 그 말 같기도 한데(…) 말인즉슨.

어떤 나라든 영재교육 하면 대학 수준의 고도화된 지식을 가르치지요. 당연한 거고요.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평가도, 어쨌든 안 할 수가 없죠. 모두에게 영재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면, 줄을 세워야 하는 순간도 올 거고요.

물론 이게 영재교육의 전부는 아니죠. 저런 선행학습이 무가치하거나 필요없다는 게 아니라, 그 이상으로 과학자로서의 자세, 과학자로서의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중요할텐데요. 그런데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데, 주위에 비해 더 나은 평가를 얻는 데 집착한다면 그런 사고를 기를 여유를 가질 수가 없지 싶어요.

특히나 천재적인 사고방식, 의외성,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능력은 여유에서 나올 수밖에 없지 싶어요. 이 여유라는 게 그냥 놀게 해 주는 여유가 아니라, 당장 성취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한 가지 연구에 골몰하게끔 해 주는 여유. 네르기간테를 공략집 안 보고 혼자 때려잡을 때까지 하루고 이틀이고 계속 집요하게 파고들게 해 주는 그런 종류의 여유죠.

 

천재를 기다리는 데 필요한 ‘여유’

그건 한 사람의 천재에게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천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것이기도 해요.

송유근 씨는 어릴 때는 천재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적인 느낌 느낌이 들었지만, 성장하면서 결국 그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했죠. 그런데, 그럼 뭐 어떤가요? 그걸로 된 거예요. 천재는 아니지만 어릴 때 보여준 학업 성취도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인재가 될 가능성이 있고, 그럼 그렇게 성장하면 되는 거죠.

어떤 사람이 진짜 천재인지, 진짜 천재적인 성취를 이루어낼지는 아무도 몰라요. 어릴 때 다른 아이들보다 돋보이는 성취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게 정말 새로운 발견을 해 내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그런 종류의 천재성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죠. 하지만 우린 어린아이들이 순간 보여준 빛나는 성취가 진정한 천재성으로 직결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단 말이에요.

‘영재발굴단’ 같은 프로그램들이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우리나라는 영재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는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오히려 그런 게 영재를 더 죽인다고 생각해요. 영재성을 발휘하는 아이들을 위해 별개의 커리큘럼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커리큘럼일 뿐이죠.

우리는 예언자가 아니에요. 천재를 미리 찾아내서 그를 과잉 보호하고 천재로 빚어내는 게 아니라, 그냥 아이들에게 맞는 적절한 커리큘럼을 계발하고 제공하는 것만으로 족한 거예요. 그러다보면 개중에 어떤 아이는 성장해 진짜로 천재성을 발휘할 테고, 또 어떤 아이는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성취로 영재로 성장하겠죠. 영재교육이란 그런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호들갑을 떨며 옆에 교수를 붙이고, 이 아이는 한국의 교육현실 따위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부추기다가… 그렇게 한 번 탄 로켓에서 내리지를 못하죠. 개중에 아주 많은 수는 결국 천재적인 성취에 이르지 못할 텐데요. 심지어 진짜 천재성을 잠재하고 있는 아이조차도 이런 식으로는 부서져버릴 수도 있죠. ‘산낙지를 먹는 아이’를 찾는 식의 영재교육 프로그램으론 훗날 진짜 괄목할 성취를 낼 연구자를 찾지도 못할 거고요.

러플린 카이스트 총장이 황우석 사태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했었죠. “한국인들의 영웅은 열차와 같아야 한다”고. 하나의 열차가 떠나면, 그저 다음 열차를 기다리면 되는 거라고 말이죠. 천재도 마찬가지이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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