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는 보수언론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 조사 결과

박근혜 정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사들을 ‘블랙리스트’로 지정해 관리했다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17년 3월 이미 한 차례 진상조사위가 꾸려졌으나, ‘일부 사법행정권을 남용했으나 블랙리스트의 실체는 없다’는 결과가 나왔었죠. 그러나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고, 논란의 중심인 양승태 대법원장 퇴임 후 추가조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18년 1월 22일 나왔죠.

[전문]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머니투데이 the L

간략히 정리하면, 특정 판사들의 명단과 그들에게 불이익을 준 사실이 기재된 사전적인 의미의 ‘블랙리스트’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 원세훈 재판 담당재판부 등에 대해 비공식적 동향파악이 이뤄진 사실이 확인되었죠. 또 행정처 심의관 출신 등의 판사들이 이른바 ‘거점법관’으로 활동하며 익명카페, SNS에 이르기까지 법관들, 특히 진보 성향이나 양 대법원장 체계의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의 정보를 수입한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핵폭탄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원세훈 항소심 당시, 박근혜 청와대의 문의에 대해 “우회적, 간접적으로 항소심 담당 재판부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답변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죠. 재판에 관한 민감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고, 재판부의 의중을 파악하고 이를 알려주려 했다는 정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법 독립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태입니다.

 

보수언론의 일관된 틀, “그렇게 들쑤시고도 블랙리스트 없었다”

사법부 독립을 중대하게 침해한, 그것도 법원행정처라는 사법부의 핵심 중의 핵심이 스스로 그렇게 한 사태입니다. 블랙리스트까지 발견되었다면 아예 사법부가 초토화될 지경이었겠지만, 지금 드러난 것만으로도 그 심각성이 심대합니다. 청와대에 동향을 보고하는 사법부라니, 삼권 분립 어디 갔습니까.

그런데 보수언론이 이 사태를 보도하는 틀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조선일보는 12면(사회면 첫 면) 이 사태를 다루며, “재조사만 두 달… 판사 PC까지 뒤졌지만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합니다. 기사 내용도 재조사위의 발표보다 반론을 소개하는 데 기울어져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1면에서 “‘판사 블랙리스트’ 없었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보도했는데, 기사 내용은 조선에 비해 비교적 중립적이나 사건의 본질보다 사법부 내부 대립에 경도된 모습이었습니다.

경제지 쪽으로 가면 더 노골적입니다. 매일경제는 29면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내용은 비교적 양측 입장을 공평하게 다룬 듯 하지만, 제목은 “1년 들쑤시고… 법관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로 매우 노골적이었습니다. 아마 데스크의 의지가 반영되었겠지요.

통신사인 연합뉴스의 기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신문사가 연합뉴스의 기사를 제공받으니까요. 특히 최근에는 실시간 속보 경쟁이 불붙는 통에 이런 경향이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연합은 “판사 동향수집 등 문건 발견…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없었다”고 소식을 전했는데요. 첫 문장이 “지난 1년 가까이 법원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던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사실무근인 것으로 나타났다”입니다.

사실무근이란 말은 ‘어떤 의혹에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니 틀린 표현만은 아닌데요, 사실무근이란 말이 실제 가진 어감이 상당히 세다는 걸 생각해보면 문장을 좀 달리 뽑았으면 싶긴 하네요. 어쨌든 이후 인터넷은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는 제목의 기사들이 한동안 물결처럼 쏟아져나오기도 했습니다.’

 

뭐시 중한디

사실 언론이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는 데 중점을 두고 기사를 뽑는 게 왜곡은 아닙니다. 없긴 없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뭐시 중한지 경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법원행정처는 말 그대로 행정에 관여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조직이 너무 비대해지고 행정, 특히 인사 업무를 총괄하면서 권력 또한 너무 커졌습니다. 재판 담당보다 행정 담당이 ‘엘리트 코스’로 여겨진다니 말 다했죠. 그 와중에 일선 판사의 동향 파악은 물론 강성이니 온건이니 하는 말로 성향을 분류하고, 심지어 청와대와 교감하기까지 했다는 건 심각합니다. 사법권 자체를 불신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동향 파악, 성향 분석, 심지어 청와대와 교감한 자료까지 나왔는데 사전적인 의미의 완전한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제목에 딱 박아넣는 게 그리도 중요했을까요.

심지어 ‘법관들이 대립하고 있다’며 대립 자체가 나쁜 것인 양 보도하는 기사는 어떻습니까? 중앙은 “사법부 내부가 조사 시작부터 끝까지 둘로 갈라져 대립” 했다며, “사법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씁니다. 이 발표에 앞서 나온 중앙의 단독 기사, “판사 80명 사표 움직임… 김명수 체제 반감 많다”와 함께 보면  끔찍합니다. 갈등이 일어난 배경을 탐사하는 대신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 큼지막하게 보도하죠.

갈등이 대체 왜 일어난 것입니까? 사법권 침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사법권 침해는 누구에 의해 주도되었습니까? 답이 뻔한 문제를 굳이 얘기하지 않는 건 게으름입니까, 아니면 의도적인 왜곡입니까.

일전 ‘댓글 수사 방해’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무려 검사가 수사를 방해한 사건입니다. 검찰이 어떤 조직입니까.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조직입니다. 검차동일체라는 완벽한 상명하복 논리에 따라 돌아가는 조직입니다. 여기서 수사를 방해하면 수사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건 법치를 완전히 무너뜨린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두고도 “너무 거친 수사가 오히려 적폐”라며 탓하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사실 보수언론 뿐 아니라 중도언론까지 이런 목소리에 힘을 보탰으니,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입니다. 뭐 그렇다고 보수언론이 묻어갈 만한 상황은 아닌 게, 동아일보는 심지어 사설까지 동원했죠. 역시 적폐의 군계일학입니다.

보수란 무엇인가요?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갖고, 시스템을 지켜나가는 게 보수의 본령 아닐까요? 그런데 시스템을 죄다 무너뜨린 이들을 비호하고, 이걸 조사한다 하니 ‘들쑤신다’ ‘대립만 보여줬다’ ‘오히려 조사가 적폐다’ 하는 게 어떻게 보수가 될 수 있을까요?

이건 보혁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수 자체의 문제죠. 박근혜 정권에서 보수는 보수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렸습니다. 적폐의 수호자로 전락했죠. 박근혜는 탄핵되었지만, 보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홍준표는 막말과 몰염치, 무논리의 화신입니다. 유승민도 구세대적 색깔론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입니다. 안철수는… (생략)

그리고 보수 언론이 있습니다. 지금 보수 언론은 정말로 보수의 가치를 지켜나가고 있습니까? 여기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바로 당신들이 적폐입니다.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뭘 기대하세요, 양심조차 없는 적폐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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