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의 할렐루야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맞은 토요일 밤

미국의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약칭 SNL은 수위 높은 정치 풍자로 유명하다. 물론 무작정 수위만 높은 건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는 물론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유력한 정치인들이 직접 출연하며, 그들의 약점을 촌철살인으로 파고드는 등 수준 또한 높다.

지난 미 대선은 모두에게 ‘멘붕’을 선사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워낙 인기가 없긴 했지만, 설마 미국민이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짓을 하진 않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다. 하지만 미국민들은 그 미친 짓을 해 버렸다.

그리고 그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받아들고 처음 맞은 토요일, 늘 그랬듯 SNL은 뉴욕에서 멋진 라이브 무대로 또 한 번 그 막을 열었다. 곡은 일주일 전 별세한 전설적인 뮤지션 레너드 코헨의 아름다운 노래 ‘할렐루야’, 가수는, 역시 늘 그랬듯, 흰 색으로 통일한 한 벌짜리 수트를 입은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아, 사실, 진짜 힐러리 클린턴은 아니었다. 그동안 SNL에서 힐러리 클린턴 역을 전담해온 배우 케이트 맥키넌이 또 한 번 힐러리 클린턴의 역할을 맡아 이 노래를 불렀다. 30년도 넘는 예전에 만들어진 노랫말이 더할나위없이 지금의 미국에 잘 어울린다. 한 번, 들어보시라.

 

힐러리 클린턴의 할렐루야

비밀스런 화음이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요
다윗이 연주했고,
하나님을 기쁘게 했던

하지만 당신은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죠?

그 노래는 이래요
4도에서 5도로 갔다가,
마이너로 떨어졌다 메이저로 올라오죠

비탄에 빠진 왕은
그렇게 할렐루야를 작곡했어요

노래 자체가 장 4도 – 장 5도 – 단 6도 – 장 5도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이는 변화무쌍했던 대선 레이스와, 소수자(마이너)가 패배하고 주류 백인(메이저)이 승리하며, 소수자에 대한 협박이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작금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탄에 빠진 왕은 누구일까?

아마 여기 와봤던 것 같아요
이 방을 본 적이 있어요, 이 층을 걸었던 적이 있어요
당신을 알기 전에는
거의 혼자였었죠

마블 아치 위에 꽂힌
당신의 깃발을 본 적이 있어요
사랑은 승리의 행진 같은 게 아니에요
차갑고
부서져 있어요, 할렐루야

힐러리 클린턴은 수 년 이상 백악관 집무실에 가장 가까운 정치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만큼 오랫동안 워싱턴 정가의 주류로 활동했지만, 여성이라는 유리천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남성 정치인들보다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고, 새로운 자리에 도전할 때마다 사소한 행실 하나하나가 입방아에 오르며 비호감이란 이미지를 짊어져야 했다. 게다가 그가 걷는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길은 그 어떤 여성도 아직 걸어 본 적이 없는, 순전히 힐러리 클린턴이 혼자 개척해야만 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승리해왔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뛰어난 직무 수행 능력을 재평가받곤 했다.

전쟁의 승리를 기념했던 마블 아치의 깃발처럼, 사랑이 늘 승리하고 그 깃발을 휘날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사랑은 때로는 차가운 패배를 감내하게 하고, 또 때로는 산산이 부서져 우리 밑에 떨어지기도 한다. 트럼프가 퍼트린 증오에 맞서 사람들은 “사랑이 증오를 이긴다(Love Trumps Hate)”고 얘기했지만, 대선의 결과는, 증오가 이겼으며 사랑이 차갑게 부서진 미국을 보여주었다.

난 최선을 다했어요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 없었기에
만져보려고 했어요
난 진실을 말했어요
당신을 속이려 온 게 아니에요
모든 게 잘못됐다 하더라도
나는 노래의 군주 앞에 서 있겠어요

오직 이 말 말고는 아무 것도 입에 담지 않겠어요

할렐루야

결과를 놓고 분석가들이 클린턴 캠페인의 실패를 지적하고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분석가들이 그 결과를 두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클린턴의 선거 전략은, 그나마 민심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틈인 데이터를 통해 그럭저럭 훌륭하게 만들어졌었다. 다만 그 틈이 생각보다 너무나 좁고 어두웠던 게 문제였달까.

클린턴은 거짓말쟁이 정치인으로 유명하지만, 그는 그가 짊어진 이미지만큼 엉터리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를 괴롭힌 온갖 스캔들은 대부분의 거짓말이 그러하듯이 어느 정도의 사실 위에 많은 거짓말들을 덧붙임으로써 완성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힐러리 클린턴은 아마 정계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는 패배의 고통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운동은 한 번의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늘 우리 편만이 승리한다면 그 또한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는 승리와 패배를 반복해가며 성장한다.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여러분도 그래야 해요. Live from New York, It’s Saturday Night!

노래를 끝낸 맥키넌 – 이자 클린턴 – 은, 전통의 오프닝 멘트로 SNL의 막을 열었다.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은 힐러리 클린턴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였다.

그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대립하는 이 세계 가운데에서 대화하고 또한 협의함으로써 최선의 해답을 찾으려 노력해왔다. 심지어 여성 정치인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누군가에겐 기득권 엘리트의 정치 방식으로 여겨질 것이고, 누군가에겐 그때마다 입장을 바꾸는 박쥐처럼 보여질 테지만, 나는 그런 그의 정치를 존중한다.

힐러리 클린턴, 멋진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멋진 여성 정치인이었다. 아니, 이 이야기는 말을 좀 달리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멋진 여성 정치인이었다. 여성이라는 성이 그에게 수없이 좌절을 안겼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멋진 정치인이었다. 이 이야기가 과거형으로 남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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