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다음 영웅을 기다려라
로버트 러플린 지음(2006)
한스미디어
로버트 러플린. 카이스트를 개혁하기 위해 자신감넘치는 모습으로 한국에 입성한 석학이지만, 결국 카이스트의 이너서클에 밀려 축출당한 실패자로서 쓸쓸히 한국을 떠났다.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기존 카이스트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 중 어느쪽이 옳은지는 묻지 마시라. 카이스트와 하등 관계없는 나 같은 인간이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지를 통해 남긴 칼럼과 에세이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이 책, <한국인, 다음 영웅을 기다려라>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러플린 총장은 한국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 희망에 대해 마치 관광객이 외국의 정경을 바라보듯이 담담하게 논한다. 이 블로그에서도 자주 사용하던 ‘바퀴벌레 세계화’라는 용어는 바로 이 책에서 그가 사용했던 것이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아주 거대하고 기괴한 사회현상을 직접 목격했다. ‘황우석’ 사태. 이 사태는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그의 연구결과에 모두가 환호했다. 가끔씩 반대의 목소리라도 들릴라치면 곧 사람들이 우르르 들고일어나 성난 목소리로 ‘딴지나 거는 패배자’로 매도해버렸다. 황우석씨의 연구는 천주교 및 개신교의 가르침과 ‘가치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었는데도, 그런 갈등 따위는 없었다. 황우석을 바라보는 방법이 단 한 가지, 일관된 방법으로 정해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같은 방법으로 황우석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은 공격당했다. 심지어 황우석씨의 논문 조작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지지자들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모두가 황우석을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플린은 본질을 꿰뚫는다. 설령 황우석이 진짜 과학자였으며 연구 결과도 진실이었다한들 문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하나의 단어, 영웅으로 귀결된다. 한국인들의 영웅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영웅은 열차와 같아야 한다, 한 열차를 놓치면 다음 열차를 타면 된다.” 그것이 그의 주장이다.
회상해보라. 황우석 사태 때 한국 사회는 올바른 결론을 내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사회가 망해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가 2000 시대를 열고,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UN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등 희망의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정말 멋진 영웅이 나타나 우리의 사회를 송두리째 바꾸어주기를 원하지만 사실 그런 영웅은 없다. 사람들은 황우석이나 심형래같은 사람을 영웅으로 취급했지만, 그들이 성공한다고 해서 큰 희망이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실패한다고 해서 거대한 혼돈이 초래되는 것도 아니다.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에게 맞추어져 있을 뿐, 그들은 그저 우리 사회를 돌리는 톱니바퀴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줄기세포도, 영화도, 경제와 정치, 사회와 문화도 모두 한국 사회의 4천만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탑이다. 황우석이 없어졌다고 해서 우리의 과학이 쇠퇴하지 않은 것처럼,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의 사회에서 영웅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회가 정체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영웅을 찾는 것일까? 어쩌면 러플린의 경험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는 카이스트를 개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에 찾아왔고, 영웅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백억의 가치를 가진 연구를 혼자 진행한다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돈을 따와 건물을 짓는다든지, 굉장한 가르침을 카이스트 구성원들에게 내려 효율성을 100% 향상시킨다든지 하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카이스트의 구성원들과 대화를 하고자 했으며, 기존의 비합리적인 구조를 타파하고 서로의 기득권을 조금씩 양보함으로써 더 건전한 카이스트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노력하여 더 건전한 카이스트를 만들기를 원한 게 아니라, 영웅이 강림하여 모든 것을 바꾸어주기를 원한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바뀌어있기를 소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웅은 없다. 굳이 영웅을 말한다면, 세상을 바꾸는 우리 모두가 영웅일 뿐이다.
황우석 사태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지부조화니, 파시즘이니, 포퓰리즘이니 하는 사회적 분석보다 이런 감성적인 위로였을런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여전히 영웅을 찾는다. 심형래가 새 영웅이 되었다. 황우석처럼 존재 자체를 흔드는 거대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심형래 역시 다양한 거짓말과 허구를 내세운 바 있고, 다양한 사회 병리적인 현상이 다시 한 번 그와 그의 영화를 뒤덮고 있다. 정작 관객들 자신이 조폭영화를 보며 그 파이를 키워주었으면서도, 그런 기형적인 구조를 스스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대신 심형래라는 영웅을 만들어 그가 충무로를 뒤엎어주리라 기대한다. 심형래는 그 기대를 자신의 홍보에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그를 영웅으로 만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온갖 음모론을 만들어 오히려 더 불건전한 사회를 구축한다. 이제 다시 한 번 러플린의 ‘위로’가 필요할 때다. 영웅에 대한 존중과 동경은 소년을 성장시키는 유년기의 꿈일 뿐, 현실 속의 영웅은 누구도 성장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영웅에 대한 꿈과 4천만의 국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진짜 사회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선택지에 놓였다.
흥미로운 분석이네요…
영웅도 영웅이지만, 전 쏠림 현상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때문에 블로거들이 아프간 얘기만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금새 디워 심형래 얘기로 바뀌더군요…
아직 아프간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상태인데도, 아프간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디워도… 한 달 후 쯤이면, 모두 잊겠죠…
문제가 제기 된 때에는 뜨겁게 불타오르다가… 어느 새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http://play.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26279
지난 2005년. 아마도 12월 초순경이었을 게다. 국민적인 스타 과학자였던 황우석 박사가 < 사이언스>지에 게재한 논문이 조작된 것이라는 내용의 다큐가 < PD수첩 >에서 공개된다는 소문이 각종 매체를 통해 알려졌다. 순식간에 온 신문과 방송에서 헤드라인으로 다뤄졌고, 인터넷 여론은 황우석 박사를 이순신으로까지 비유해가며 그를 옹호하기에 바빴다.
< 사이언스> 지에 게재되었든 아니든, 황우석 박사의 경력이 어떻든, < PD수첩 >이 사이언스 보다 권위가 없든지, 하여간에 혼란한 여론을 정리하려면 직접 나서서 검증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인터넷에 올렸었던 본인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댓글들은 온통 욕과 인신비방으로 가득찼고 을사오적에 준하는 매국노와 같은 취급도 받았다. 더욱 기가 찼던 것은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사용될 난자를 무상 제공하겠다면서, 제 딸의 손을 잡고 난자 기증 운동에 참여했던 한 어머니에 대한 신문 기사였다.
물론 그 사건이 터지기 전에 세계 수준의 연구 성과들을 냈었던 까닭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황우석 박사가 그토록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은 화려한 언론 장악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유수 연구기관보다 앞선 연구를 할 수 있는 이유로 ‘한국인’만의 쇠젓가락 기술이 있다는 칼럼을 써 내고 암소 자궁에 직접 손을 넣어가며 연구를 한다는 사실로 서민적인 이미지까지 얻었다. 한국인이 유독 쇼비니즘과 서민적 친근감에 쉽게 이용되는 것을 알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언론에 노출된 그가 국민적인 영웅이 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자기 딸의 난자 보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를 소중히 여겼던 어머니에게는 황우석의 연구를 의심하는 것이 국익에 저해되는 행위이고 민족 반역자이며 10년 후의 한국에 위기를 초래하는 일이라는 쇼비니즘적 생각이 단단히 박혀 있었던 것이다.
요즘 < 디워>에 찬양 일색인 네티즌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 사건의 현상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CG는 좋지만 연출이 부족하다는 내용의 논리정연한 글 들도 각종 욕설 포화를 맞거나 단어 꼬투리를 잡히며 사장되고 있다.
< 디워>를 보고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면 한국인도 아닌양, < 디워>를 ‘정당하게 비평’하는 사람들은 맹목적인 ‘심까’이거나 개인의 감상을 대다수에게 강요하려는 편협한 것들인양 취급 받고 있다. 지금 그들이 말하는 ‘심까’는 찾아보기 힘듦에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 하는 한국인 특유의 질투심을 가진 ‘심까’들을 성토하는 글이 넘쳐난다.
심 감독을 개그맨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영화’쟁이’ 충무로 인간들과, 영화글’쟁이’ 칼럼니스트들을 내려다보면서, 질투할 줄만 아는 그들과는 다르게 심 감독을 인정할 줄도 아는 자신에 대해 대단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심 감독의 첫 번째 본격 괴물 영화로서 할리우드 배우의 기용과 엄청난 제작비를 들였던 것으로 굉장한 기대와 화제를 모았던 < 용가리>가 개봉한 1999년. 실망의 충격이 사람들을 한 차례 훑고 간 후에, 심지어 ’100억짜리 사기극’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심 감독을 옹호하는 여론은 별로 없었다.
그의 도전 정신을 높게 사는 이들은 간혹 있었으나 그에게 열정만한 재능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겨우 7년 만에 국민적인 우상으로, 대한민국 SF의 거장으로 회귀했다.
이처럼 어떤 유명인에 대한 부정적인 수식어구들이 짧은 기간에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 아닐는지. 이러한 대반전은 영구 출신 심형래씨의 가히 천재적인 언론 플레이 덕분인가. 아니면 < 디워>가 정말 대단한 작품이기 때문인가.
2시간여 남짓되는 영상물이 좋은 영화로 평가 받기 위해서 갖추어야 최소한의 필수 조건에는 장면 등장의 당위성이 포함된다. 빈약한 스토리 라인을 가진 할리우드 오락 영화들도 앞 뒤 신과 관계 없는 장면을 삽입할 정도로 시간의 사치를 부리지는 않는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 그리고 매 신마다 그 장면이 나와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영화는 그렇게 짜여져야 관객들이 수월히 몰입할 수 있고 더욱 재미를 느끼는 것이며, 그렇게 짜여지면 캐릭터 밖에 없는 빈약한 영화들도 오락적으로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다.
동양의 신비한 전설에 기반한 특색있는 스토리와 평균 이상의 CG액션 및 캐릭터 특성을 가지는 < 디워>도 그러한 기본 조건을 피해간다면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 디워>는 신의 등장 당위성과 무리없는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많은 영화들에서는 앞뒤 장면과 큰 관계가 없는 아주 짧은 신들이 간단한 코미디로 웃음을 주거나 등장 인물의 성격, 또는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양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 디워>에서는 짧은 신을 과용하고 있다.
가령, 거지신은 대체 왜 나와야 했을까? 장면 연결의 부드러움을 만족한다고 보기에도 문제가 있다. 불한당 세 명이 새라를 괴롭히는 신은 이든과 새라의 조우를 일어나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는데, 앞선 장면들과 전혀 개연성이 없다. 그리고 경찰서 신 같은 경우, 이든이 새라를 찾을 때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중요한 장면인데도, “여자가 치한 세 명을 때려 눕힌 사건”을 헤드라인감으로 보는 LA 대형 언론사 기자가 사진 두어장 찍더니 사라져 버린다.
괴물에게 쫓기다 갑자기 해변을 걷고 사랑을 표현하는 신은 후반부를 위한 중요한 포석임에도 급작스러운 등장이 당황스럽다. 이처럼 곳곳에서 발견되는 허구의 리얼리티 부재가 장면 연결의 부자연스러움을 낳았고, 발전된 CG나 심형래식 훌륭한 위트가 빛을 바랜 것도 이 때문이다.
심 감독은 < 디워> 개봉 전 여러 인기 TV프로그램에서, 할리우드 배우가 ‘이것은 한국의 전설이다’라는 대사를 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쇼비니즘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을 겨냥한 발언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의도가 아니라 그로 인한 결과다.
< 디워>가 최고의 영화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이것은 한국의 전설이다’라는 미국인 배우의 극 중 대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들, 그리고 영화 마지막의 감상적이고 선동적인 에필로그에 박수를 치며 영화관을 나왔다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영화적 취약성을 비평한 글에 악플을 다는 일들을 가만히 지켜보노라면 쇼비니즘과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애초에 서민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그가 쇼비니즘에 기반한 대중 노출방식 – 어쩌면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선동이 무조건적인 < 디워> 옹호 여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앞서 말한 황우석 박사 사건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심 감독은 허위로 밝혀질 논문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열정적인 한 인간에 대한 나 개인의 존경심에서 나온 다행스러움은 아니고,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 중 괴물 영화의 대가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대중에게서 사장될 일은 없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다.
그러나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의 다음 작품에서도 영화적 허술함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은 존재한다. 논리적인 비평은 그의 작품을 더욱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므로, 네티즌들이 적어도 쇼비니즘적 에필로그를 통한 신근효과의 영향으로 연출력 부족을 덮어 주려는 노력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마 심형래씨도 자기 영화에 대한 정당한 비평은 환영할 자세가 되어 있는 감독이 아닐까.
글 참 차분하게 잘 쓰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어제 오늘 검색해서 이런 저런 글들을 읽고 있는데, 좋은 잘 읽고 갑니다. ^^
한국적 영웅도래에 대한 멋진 분석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
소위 ‘빠’를 거느릴 수 있는 사람들에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황우석이나 심형래는 내 기준에서는 도저히 심취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도대체 왜 그토록 열성적으로 지..
‘영웅은 무시간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웅을 ‘오해’하고 있진 않나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