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마주친 딜레마: 아이폰 SE와 아이패드 프로 9.7

애플이 현지 시각으로 21일, 한국 기준으로 22일 스페셜 이벤트를 통해 아이폰 SE와 아이패드 프로 9.7인치 모델을 공개했다. 이미 루머로 다 퍼진 내용이라 흥미로운 내용은 많지 않았는데, 아이폰 SE의 사양과 가격이 의외로 매력적이었다는 점 정도가 세간의 관심을 끌었을까나.

 

40주년

키노트는 40주년 기념 영상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 4월 1일 ‘애플’ 이라는 이름의 개인용 컴퓨터 키트를 팔기 시작하며 만들어진 이 회사(?)는 매 10년마다 나름 기념비적인 제품을 내놓았다. 1984년에는 오늘날까지도 애플의 컴퓨터 라인업을 책임지는 약칭 맥(Mac), 매킨토시를 내놓았고, 1997년에는 ’20주년 기념 매킨토시(Twentieth Anniversary Macintosh, TAM)’이라는 겁내 쩌는 대신 가격이 정신나간 실패작(…)을 만들었다. 그리고 30년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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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30년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는 오그라드는 문구를 내걸더니 진짜로 그만한 물건을 내놓아버렸다. 2007년은 아이폰이 태어난 해다. 그리고 올해 애플은 40주년을 맞았다. 40주년에 걸맞는 물건들이 좀 나왔을까.

 

(진짜로) 저가형 시장에 진입하다

아이폰 SE는 아이폰 5s 이후 한 세대를 건너뛰고 등장한 새로운 4인치 아이폰이다.

ScreenClip [18]

애플은 원래 단 하나의 플래그십 라인업만을 고수했다. (Plus 라인업은 변종이라 칩시다.) 저가형 시장 공략을 위해 다른 회사는 저가형 라인업을 따로 내놓았지만, 애플은 작년 플래그십 모델의 가격을 한 단계 낮추는 식으로 이 시장을 공략해왔다.

애플이 이 전략을 변경했던 것은 아이폰 5c 때가 처음인데, 썩 만족스런 결과를 내진 못했던 것 같다. 아이폰 5c는 아이폰 5s와 함께 출시되었으면서도 전작인 아이폰 5 수준의 퍼포먼스밖에 내지 못했으며, 소재도 플라스틱으로 고급스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격은 플래그십인 5s와 비교해 100달러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아이폰 SE는 정직한 복기의 결과물이다. 플래그십과 같은 AP를 채용했고, 금속과 유리 소재로 고급스럽다. 가격도 399달러로 훨씬 싸다. 심지어 사양이 떨어지는 아이폰 6보다 더 싸다. 결국 애플도 다른 회사들처럼 자연스레 큰 화면은 플래그십, 작은 화면은 저가형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이미 몇 세대나 지난 모델인 아이폰 5와 디자인이 동일하다는 점. 이를 통해 구매의욕을 떨어뜨려(?) 이 저가형 폰이 아이폰 6s가 자리한 플래그십 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스마트폰 제조사가 같은 딜레마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레드오션이 되어버린 스마트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가형 라인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저가형 라인업은 동시에 자사의 고가형 라인업을 잠식해 수익성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3D 터치는 빠졌지만 라이브 포토 기능은 들어갔는데, 이건 3D 터치가 얼마나 쓸모없는 기능인지를(…)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3D 터치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신기능이라고는 라이브 포토 정도 뿐인데 3D 터치가 없어도 잘만 쓸 수 있다지 않는가.

 

이건 정말 프로일까

처음에는 아이패드 에어가 애플 펜슬을 지원할 거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9.7인치 아이패드 프로가 나올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값 올리려는 거구나.”

결국 후자가 맞았다.

ScreenClip [16]

아이패드 프로는 노트북을 연상시키는 12.9인치 액정을 달고 있었는데, 이번에 9.7인치 모델을 새로 출시했다. 휴대하기도 무리가 없고, 책을 읽거나 영상을 감상하거나, 가볍게 그림을 그리기에도 무난한 그야말로 기본 모델이다. 32기가 모델이 599달러에서 시작하며, LTE 지원 모델은 130달러를 더 내면 된다.

기존 아이패드 가격대를 생각하자면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이 납득하고 넘어갈 가격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려면 애플 펜슬이 필요하다. 99달러다. 스마트 키보드는 149달러다. LTE 지원 모델에, 악세서리를 하나만 추가해도 100만원을 호가하는 셈이다.

애플은 아이패드 프로의 성능이 PC 수준이라고 주장하며, (같은 가격대, 같은 시대의 PC와 비교하자면 당연히 무리겠지만)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아이패드 프로는 게다가 가볍고, 배터리 수명도 길다. 하드웨어를 보자면 그만한 가치를 하는 컴퓨터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를 보자면, 애플의 핵심 경쟁력이(었다)라는 그 소프트웨어를 보자면 얘기가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한 기본 메모 앱에서도 뛰어난 효용성을 발휘하는 애플 펜슬에 감탄한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그 기본 메모 앱이 애플 펜슬을 가장 잘 지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키보드를 지원하긴 하지만 멀티태스킹은 여전히 한정적이고, 인터페이스는 기존 PC에 비해 너무 단순하며, 프로급 작업을 하기에는 현저히 불편하다.

결국 9.7인치 모델도 아이패드 프로의 어중간함을 벗어나진 못했다. (그림 등 특정 분야를 제외하면) 프로급 작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인터페이스도 불편하고, 특히 소프트웨어는 (그 특정 분야에서조차) 많이 부족하다. 스마트 키보드는 아이패드 프로에만 붙는다는데, 별 매력이 없다. 그냥 싼 아이패드 에어나 미니를 사다가 블루투스 키보드를 붙여 쓰면 그만이다.

애플은 혁신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사실 한 차례의 큰 혁신 이후에는 오히려 보수적으로 제품을 개선해오곤 했다. 하지만 아이패드는 그런 보수와 개선만으로는 갈 길이 막막하다. 프로 작업에는 부족하고, 단순한 컨텐츠 소비에는 과하다. 아이패드가 맞닥뜨린 딜레마다. 지금이야말로 혁신이 필요한 시기이건만, 애플은 혁신 대신 역대 가장 재미없는 키노트 중 하나를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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