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 피오리나 – 힘든 선택들
Tough Choices by Carly Fiorina

 
Carly Fiorina 지음(2006), 공경희 옮김(1996)
해냄

성공담을 듣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지만, 그 성공담이 부자의 도덕률과 “나는 정도를 걸음으로써 성공했다”는 자화자찬으로 빠져버리면 그때는 참 듣기가 괴로워진다. 우리는 부자들의 성공이 도덕과 올곧음 대신 편법과 비인간성, 위선과 거짓말 따위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 예를 들어 우리는 이재용 상무가 삼성의 경영권을 세습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탈법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이 최대의 광고주인 삼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보도를 자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알고 있다. 또한 이재용 상무의 성공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그가 이건희의 아들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icon 스티브 잡스>가 재미있는 반면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이 읽기 괴로울 정도로 따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icon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 본인이 쓴 책이 아닌 탓인지 그의 치부와 거짓을 낱낱이 고발한다. 물론 스티브 잡스가 이재용이나 이건희처럼 누구누구의 아들로 태어난 덕에 성공의 열쇠를 쥐게 된 자본주의적 귀족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나처럼) 인격적 결함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의 스타성과 ‘현실 왜곡의 장’ 저부에 제왕적 카리스마나 독단이 숨겨져있는 것 또한 쉽게 추측 가능한 일이다. <icon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의 이 수많은 치부와 약점들을 낱낱이 드러내며, “이게 스티브 잡스의 인생”이라고 말한다. 또한 어쩌면 그 독단과 제왕적 면모가 그 성공의 열쇠였을런지도 모른다고 솔직히 얘기한다.

반면 <칼리 피오리나-힘든 선택들>은 본인이 직접 자신의 인생에 대해 쓴 책이다. 그러다보니 <icon>과 달리 본인의 결점과 실패는 쏙 빼놓고 완전한 도덕률과 정도를 지키는 칼리 피오리나만이 책을 가득히 메우고 있다. 경영자로서의 칼리 피오리나가 밟아온 길을 도식적이고 서술적으로, 특색 없는 문체로 그린다. 한 인간으로서, 딸으로서, 여성으로서, 문화인으로서의 칼리 피오리나는 이 책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예를 들어 그녀는 머릿말에서 “내가 받은 최대의 선물은 부모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정작 책을 모두 읽어봐도 그녀가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술한 부분은 없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진로를 결정하거나(초반부), hp로의 이직을 결심케 만드는 무의식적 동기로 작용하거나 하는 등 철저히 ‘경영인으로서의 칼리 피오리나’를 위한 장치로 등장할 뿐이다. 그녀는 “내 영혼은 나의 것”이라는 도덕률을 곳곳에서 들이미는데, 그 진정성은 이해가 가지만 너무 도식적인 타이밍에 등장해 감흥을 주지 못한다. 책의 전반적인 감상을 여덟 글자로 요약하자면, “재미없고 따분하다”는 것이다.

인간미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hp와 컴팩의 합병 과정에서 단행한 정리해고에 대해 그녀는 따분하기라도 하다는양 단 몇 줄로 얘기해버린다. 회사의 효율적 경영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hp의 경직된 문화가 그걸 방해했다, 는 식이다. 엄청난 규모의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수많은 언론매체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가 하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몰감성적인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부분은 ‘여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불이익들’을 묘사할 때인데, 이성적으로는 공감하고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부분이긴 하지만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권신장운동가들로부터 마초이즘이라고 공격받기 딱 좋을 말이긴 한데, 사회적 모순 속에서 강력한 가해자 입장(정리해고의 단행자)에 있던 그녀가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피해자 입장(여성)에 설 때마다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다는 것이 너무나 모순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성 경영자로서 칼리 피오리나의 성공이 결국 신자유주의 하에서 마찰적 실업을 촉발시키고 영구적 실업을 발생시키는 경제학적-사회학적 모순 위에 성립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녀를 여권신장의 운동가로서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박근혜를 지지하는 여권신장운동가란 참된 존재인가 하는 케케묵은 논쟁거리와 함께,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와이어드(Wired)와 칼리 피오리나가 가진 인터뷰가 나의 마음을 강력히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hp에서 해고당한 것과 관련해 본인의 솔직한 심경을 표현하고 거친(Tough) 문제의식을 드러낸 그녀가, 설령 그 모든 언행이 짙은 정치적 의도를 함의하고 있었을지라도 참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 전문을 읽어봐도 그녀는 그 이상의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후세에 이르러, 사람들이 칼리 피오리나를 hp의 구세주로 표현할지, 끝까지 현재의 부정적 평가를 거두지 않을지 역시 피오리나 자신의 자서전보다는 실리콘밸리의 호사가들에 달린 몫일 뿐이다.

  3 개의 반응

  1. 저도 이 책 사놓고서 초반부를 쉬이 넘기지 못하고 있어요. 책 고르기가 이 책의 제목처럼 “힘든 선택”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읽어내려고 애쓰고 있지만, “재미없고 따분하다”는 솔직한 감상평이 읽기 속도가 더딘 저한테는 오히려 위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을 공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 저는 상당히 좋아하는 책입니다. 그녀의 도덕률이 그녀를 지켜주는 수단이었을거라는 생각을 강하게 한 편이었고요. 그녀가 도덕적인(설사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이었을지라도) 모토를 강조하고, 그걸 실생활로 끌어오지 않았다면 어느 위치에선가 그녀는 약점과 추문을 통해서 발목이 잡혔을테니까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인님께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라고 표현하셨지만 저로서는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딱히 흔들리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정말로 옳았는가, 아닌가는 별개로 친다해도 그녀 자신은 흔들림없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3. 책은 결국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더불어, ‘독자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도 책을 내 것으로 흡수하는데 큰 일조를 하는 것 같아요. hwsj 님과 빨간그림자 님께서도 감상을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댓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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