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히 펼쳐진 ‘당신’들의 세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You”를 선정했다. 머쓱했는지 타임지가 그 아래에 밝힌 사족은 이렇다. “네, 당신입니다. 당신이 정보화 시대를 지배합니다. 당신이 생산하는 세계, 환영합니다.” 1인 미디어이자 개인 저널리즘의 산실 블로그(Blog), 개인이 생산하는 멀티미디어의 장 유튜브(Youtube), 거대한 유행처럼 번져나간 마이스페이스(MySpace)의 열풍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주인공인 세상이 정말 도래한 것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1촌 열풍과 MNCast, 디씨인사이드의 열풍 쯤으로 비견할 수 있을까? 물론 인터넷과 뉴미디어가 기존 ‘언론권력’이 생산한 담론을 재생산할 따름인 찌질한 공간이라는 비판론도 만만찮지만, 그 아이러니를 껴안고 타임지의 견해가 옳다고 믿어 보기로 하자.

실제로 인터넷은 분명 어떤 측면에선가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상당 부분 해소한 측면이 있다. 과거 ‘용팔이’라고 불리며 손님들을 등쳐먹기로 유명했던 용산 전자상가가 몰락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과거, 소비자는 판매자의 거짓말에 그대로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용팔이들이 온갖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것에 비해, 소비자들은 마땅히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디씨인사이드에서 삼십 분만 ‘눈팅’ 해 보면 최근의 인기 기종, 시세 흐름 등이 쫙 나온다. 용팔이가 알고 있는 정보는 소비자도 알고 있고, 용팔이가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행동을 하면 소비자는 가게 문을 나서 버린다.

한의학, 100개의 폐쇄적 사회와 100개의 진리

반면 아무리 인터넷 세계가 위대한 정보의 세계라 하더라도, 한의학만은 그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보통 사람들의 패러다임과 한의사들의 패러다임 사이에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의사들은 음양오행과 장상, 경락론을 기본으로 자신들의 파라데이그마를 형성했지만, 사실 현대 사회에서 한의학같은 파라데이그마를 갖고 있는 분야는 없다. 서양에서 유래한 자연과학의 파라데이그마와 한의학적 파라데이그마의 교집합이란, 최종덕 교수의 우호적인 견해를 원용하더라도 극히 일부, 사실 ‘점’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한의사들이 암만 “음이요, 양이요, 음양오행, 음양오행” 하며 한의학 이론의 정당성을 설파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게 외계인의 언어나 아틀란티스 고대문명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질문을 던져 보자. “한의학적으로 심은 신명을 주관한다고 하는데, 여기에서의 심은 해부학적인 심장이 아니다.” 이 말이 이해가 가는 분? 정말 학술적인 견해처럼 느껴지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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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지식은 본디 사회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시대의 이해를 구하지 못하는 지식은 배제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배제되어야만 한다. 굳이 “좋은 상품이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상품이 좋은 것”이라는 경영학적인 사고가 아니더라도, 지식이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며,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지식은 당대에는 가치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동설처럼 당대의 가치없던 지식이 후대에 위대한 발견으로 추앙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러한 혁명적인 지식인도 위대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의사들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초라한 뒷태를 닮고 싶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들에게 있어 문제는 후대에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당장 얼마나 인정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대의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다, 이 “You”의 세상에 끝까지 정보의 비대칭성을 고수하는 한의학은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마땅했을 것 같다. 그러나 한의학은 신기하게도 살아남았으며, 게다가 시장 규모도 증가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무언가가 이런 정보의 비대칭성과 파라데이그마의 간격을 채워온 것이다. 감히 생각컨데, 그것은 비이성적 신뢰와 권위였던 것 같다. “해 보니까 낫더라”는 식의 무작정적인 믿음과, 어쨌든 ‘의사 선생’이라는 식의 태도, 그리고 ‘비방(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처방)’을 하나 잡음으로써 얻는 폭압적 권위다.

치기어린 시선으로 살펴보건데, 한의학은 권위로 똘똘 뭉쳐져 있다. 모두가 권위자다. 교류가 없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세상에서는 자기가 영원히 왕이다. 둘이 사는 세상에선 둘이 왕도 해 먹고 대신도 해 먹을 수 있다. 역시 영원히. 그러나 100명이 사는 세상에서는 다르다. 1000명이 사는 세상, 1만 명이 사는 세상은 더더욱 다르다. 그 누구도 영원한 절대자가 될 순 없다. 영원한 진리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만 6천 한의사가 배출되어 있다는 한의학계에 절대자나 진리가 너무 많은 것이다. 이렇게 된 이후는 명약관화하다. 한의학과 다른 학문 사이의 학술적 교류는 물론이거니와, 한의학계의 학회 사이에도 학술적 교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만 6천 한의사가 있다지만, 그들은 1만 6천 명 분의 개방된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백 개 이백 개의 폐쇄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xx학회에도 왕이 있고, oo학회에도 왕이 있다. 둘은 전혀 다른 것을 주장하는데, 둘 다 옳다. 서로의 세상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100개의 폐쇄적 학회가 100개의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100개의 폐쇄적 세상에는 100개의 진리가 있다. 한의학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100개의 개방적 세상에는 단 하나의 진리도 없다. 다만 진리를 향해 끝없이 탐구하는 100개의 노력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파라데이그마다.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는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의학은 정보의 비대칭성과 “자신들만의 파라데이그마”가 가진 부실을 감추기 위해 100개의 폐쇄적 세상과 100개의 진리를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로버트 라이히는 어떤 유명 대학의 경제학부를 일컬어, “잘난 사람은 없고 서로를 잘났다고 추켜세우는 사람들로만 가득한 곳”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적이 있다. 그런 세상에서 학문적 발전이 있을 턱이 없다. 한의학 역시 마찬가지다. 100개의 폐쇄적 세상에서, 100개의 집단이 100개의 진리와 100명의 도사님을 ‘핥아주고’ 있는 중이다. 결국 “You”의 세상에서, 한의학은 천천히 썩어들어가고 있으며, 그 결과 아마도 수십 년 내에 죽을 것이다. “You”가 만들어가는 이 열린 세상에서, 대체 누가 폐쇄적이기 짝이 없는 이상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일부러 찾아간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의 건강이 직결된 문제를 두고.

나의 스승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 가진 “젊음”에 기대함

부끄럽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회의 뿐이며, 정작 한의학을 살리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나의 능력조차 믿지 않으며, 공부 또한 너무나 짧은 나머지 누구 하나 진료할 수 없을 수준이다. 아마, 나야말로 한의학을 썩어 죽게 만들 일등 공신일지 모른다. 그러나 확신컨데, 적어도 한의학이 완학(완전한 학문)이라고 주장하며 그 어떤 변화도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황제내경과 음양오행은 무조건 옳으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종교인들에 비하면 이 무기력한 청년의 모습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더욱 바람직한 사람들이 있다. ‘존경’이란 말을 붙이지 않을 수 없는 진정한 스승들이며, 끝없는 고민과 노력으로 정진하고 있는 나의 친구들이다. 물론, 인정한다.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결코 많은 수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바람이 불고 있다. 늙은 세상으로부터 젊은 세상으로. 음양오행과 ‘완학’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 한의학을 끝없이 발전하는 젊은 학문으로 인식하고, 다양한 시도와 실험으로 한의학을 대중적 파라데이그마로 끌어오려는 연구자들이 계속 늘고 있는 것이다. 소통은 시작되었다. 음양오행을 절대적 권좌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있고, 적은 연구비와 연구규모지만 꾸준히 역학적 실험을 수행하는 진실성있는 연구자들도 있다. 또한 늘고 있다. 한의학적인 진리가 근간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비로소 한의학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나는 한의학이 가치없는 옛 인습이 아님을 확신하며, 위대한 미래를 가진 의학의 한 흐름임을 주장한다.

물론 거기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도 있다. 그들은 파벌을 형성하며, ‘자기 사람’을 요직에 앉히거나 후계자로 키우고, 자신의 이론만이 절대적인 진리인 양 101번째의 폐쇄적 왕국을 세운다. 이 ‘늙은 힘’ 또한 만만치 않다. 그렇기에 나는 제 2의 장개빈을 기대한다. 능력있는 나의 친구들이 한의학의 100가지 진리를 마음껏 까 부수기를, 혁명과 윤회(Revolutions), 발전의 순환을 이뤄내주기를 바란다. 두 바람이 부딪힐 것이다. 젊은 바람이 승리한다면 풍파가 계속 불겠지만 한의학은 살아남을 것이고, 늙은 바람이 승리한다면 바람은 멈추겠지만 곧 세상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2 개의 반응

  1. 예인님의 미래가 굉장히 기대되는 글이군요. 현대 한의학은 양의학과 여러모로 교류를 한다고 들었는데 그 규모가 소수인 것 같아 아쉽기도 하고요. 그런데 현대 한의학은 과연 과학이라는 규준을 따르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한의학의 기본적인 존재론 자체가 이미 과학이라는 규준으로 밝혀낼 수 없는 어떠한 것이라면 (좀 무식이 드러나지만 대다수가 한의학에 대해 이 정도의 생각만을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과학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 한의학 스스로를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도 궁금하고요. 어느 정도 관심이 있음에도 접근해 본 적이 별로 없었네요, 접근 자체가 용이하지 않기도 했고…

    • 저 따위보다야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

      글쎄요, 제 배움도 짧아 함부로 어리석은 의견을 드러내도 될지 잘 모르겠지만…… 한의학의 존재론 자체가 과학의 범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짧은 댓글로 함부로 말씀드릴 순 없을 것 같고, 후에 긴 글을 통해 정리해볼게요.

      한의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훌륭한 학자로 최종덕 교수같은 분이 계십니다. 과학철학을 하는 분인데, 한의학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요. 관심이 있으시다면, 최종덕 교수님의 관련 저서를 찾아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한의학과 양의학의 교류에 대해서는….. 제가 자체적으로(^^;; ) 판단한, 가쉽이지만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있어요. 제 좁은 시야로 감히 판단하기에 – 병원이나 영리 목적의 기관에서는 한의학과 양의학의 교류가 상당히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고, 보통 사람들도 그럭저럭 양의학과 한의학을 다양하게 비교해보고 있는 것 같아요. 반면 학계는 아직도 거의 교류가 없는 실정이고, 협회끼리는 겉으로는 반목하면서 속으로는 서로의 밥그릇을 빼앗기 위해 안달이고, 학생끼리는 순수하게 100% 반목중인 느낌을 받습니다. 재미있어요. ‘돈’과 관계된 일에서는 참 두 의학이 한없이 가까워진다는 게…… 어쨌든 한국에서만은, 한의학과 주류의학의 협진 및 융화로부터 ‘돈 냄새’가 나기 때문일까요? 학생들이 서로를 반목하고 질시하는 것은, 그들이 ‘돈 냄새’를 맡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냥 찌질하기 때문일까요? -ㅅ-;;

      참 흥미로운(?) 문제들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

 댓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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