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노예
The Future of Success

Robert Reich 지음(2000), 오성호 옮김(2001)
김영사

“사람은 정체성을 팔아야 한다.” 이계인씨가 한 쇼 프로그램에서 인용하여 ‘뜬금없이’ 화제가 된 이 말은, 사실 바로 이 사람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의 말이다. 이어지는 라이시의 말은 이렇다. “옛날 어떤 사람에 대한 최악의 평가는 자신을 팔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팔지 못한다는 말이 모욕이 되었다.” 로버트 라이시의 말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팔고 팔려야만 한다. 지금 당장, 그 어떤 경제학원론 책을 펼쳐봐도 고용과 노동을 설명하는 가장 기초적인 이론은 ‘공급-수요의 그래프’ 아니던가.

로버트 라이시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팔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임예인이란 인물이 레인콤에 입사해 “아이리버 라임(rhyme)”이란 MP3 플레이어를 기획했다고 해 보자. “아이리버 라임”은 전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켜 애플의 아이팟을 누르고 세계 최고의 MP3 플레이어가 되었다. 과거였다면, 이것은 ‘레인콤의 성공 신화’로 기록되었을 것이며, 정작 “아이리버 라임”의 기획자인 임예인의 이름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것은 ‘레인콤의 성공 신화’이자, 동시에 ‘임예인의 성공 신화’이기도 하다. 레인콤의 수익이 늘어난만큼 임예인의 몸값도 올라갈 것이다. 만일 레인콤이 올라간 임예인의 몸값만큼 정당한 대우를 해 주지 않는다면, 임예인이 언제 삼성전자로 옮겨가 엄청난 대우를 받으며 “옙 플로우(flow)”란 제품을 기획할지 모르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사례도 가능하다. 임예인이 기획한 “아이리버 라임”이 대실패를 거두었다면, 이는 레인콤의 실패일뿐 아니라 임예인의 실패이기도 하다. 레인콤은 더이상 임예인과 고용 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것이며, 임예인은 실업자가 될 것이다. 정규직이란 개념도, 평생직장이란 개념도 없다. 임예인은 더이상 레인콤이란 회사에 귀속되지 않는다. 고용의 개념은 레인콤이란 브랜드와 임예인이란 브랜드가 계약을 맺는 형태로 변화한다. 임예인은 레인콤과의 계약 요건이 자신의 가치에 비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순간 계약을 파기하고 떠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인콤도 임예인과의 계약 요건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임예인을 쫓아낼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자본주의에서는, 임예인도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기크(Geek / 창조자)와 슈링크(Shrink / 기획자)로써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높여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비열한 방법으로라도 자신의 브랜드를 홍보해야 한다. 유력한 국회의원에게 로비를 넣는다든가, ‘회장님’과 사진 한 장 박아놓고 거실에 걸어 놓음으로써 자신의 인맥을 과시한다든가, 회사와의 신의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쪽으로 직장을 옮겨 버린다든가, 타인의 좋은 아이디어를 헐값에 사들여(사실상 훔쳐) 내 것으로 만드는 것 등이 그 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회사에 바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에선 가장 멍청한 짓이다. “민주적인 시장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임예인이 암만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건희나 스티브 잡스를 상대로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6억 달러의 유산을 물려받은 상속자와, 6천 달러의 유산을 물려받은 상속자는 순수하게 “능력”만으로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 접어든 지금, 당연히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스포츠맨쉽과 “정당한 경쟁”이란 말놀음에 함몰될 때, 그 차이는 더욱 커져만 갈 것이다. 시장은 가장 야비한 경쟁자에게 가장 값진 결실을 제공해준다. 당신은 가장 야비한 방법으로, 24시간 쉬지 않고 레이스를 벌어야 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

전여옥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자신의 저서 <대한민국은 있다>에서 <부유한 노예>를 인용한다. 그녀가 박근혜를 칭찬하며 한 말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 ‘타고난 공주마마’ ‘독신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은근한 흠모’ ‘어머니 육영수가 남긴 잔영 효과의 100퍼센트 이미지업’ 을 통해서 자신을 정치 시장에 유능하게 팔았다.”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기도 하고, 재입당하기도 하고, 당 대표가 되기도 하고, 다시 사퇴하기도 하면서 현재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다. 이는 그녀가 정당한 정책 경쟁을 통해 얻은 결실이 아니라,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가장 야비한 경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얻은 결실이다. 전여옥은 그 점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럼 뭐가 어때서?”

그러나 전여옥의 박근혜 평가는 무언가 핀트가 한창 어긋난 것 같다. 사실 그녀가 로버트 라이시의 책을 다 읽기나 한 것인지, 아니, 최소한 머릿말이라도 읽고 그 책을 인용한 것인지 의심이 갈 지경이다. 사실 로버트 라이시는 거기서 이야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실컷 “야비하게 경쟁해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다가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근데, 이래도 괜찮겠어? 그렇게 야비하게 경쟁하고, 쉴 틈 없이 일해서 돈을 벌고 살아남는다고 쳐 봐. 그럼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김혜자씨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부유한 노예>를 인용한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말했던, 꽃과 사랑으로 세상을 수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평화주의자 김혜자씨. 그녀는 자신의 저서 <천국을 수놓은 작은 손수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쁜 것인가, 가족과 외식은커녕 밥상에 다 같이 식사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내가 출세해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아내와 아이들은 불행에 젖어 사는데 명예를 얻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 생각으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됩니다.” 김혜자씨가 말하는 이 일화는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부유한 노예>의 저자, 로버트 라이시에 대한 얘기다. 로버트 라이시는 미국 경제사상 최대의 활황을 주도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이었으며, 민주당의 경제노선을 대표하는 정치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람이,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뒤 이내 장관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소위 ‘미국적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부유한 노예>는 사실 바로 이 에피소드를 머릿말으로 해서 시작되는 책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결국 책은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부유한 노예>는 놀랍게도, 책을 읽기 전부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있다. 전여옥처럼 읽을 것인가, 김혜자처럼 읽을 것인가? 무한하고 야비한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받아들이고 이에 적응할 것인가,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깨닫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날 것인가? 더욱이 어렵게도, 이 선택은 개인의 몫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몫이기까지 하다. ‘지식 소매상’ 유시민이 자신의 최근작 <경제학 카페>에서 이 책을 기백 권에 달하는 추천 도서 중 한 권으로 올려놓은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경제학적 지식과, 모든 사회학적 지식과, 그리고 무엇보다 삶과 사랑, 행복에 대한 철학이 동원되어야 하는 아주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다.

  2 개의 반응

  1. 대단히 흥미있는 책이네요. 시간이 나면 한 번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장관들이 저 정도의 철학적 성찰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미국이란 나라가 사뭇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덤으로 전여옥의 독해 능력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군요…;

    • 사실 책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기 때문에, 충분히 전여옥처럼 읽을 수도 있을 거에요. 분량상으로는 책 대부분이 “신경제에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다루고 있거든요.

      다만 전여옥씨가 평소 하던 짓(!)도 있고, 이 사람이 박근혜를 추켜세우기 위해 억지로 끼워맞추고 있구나 하는 인상도 받았고….. 게다가 정치인이란 이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존재인데, 그런 존재가 “정치판에 자신을 유능하게 팔았다”고 칭찬하는 것은…… 책의 본의를 상당히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버트 라이시는 그런 “신경제적 사고방식”이 무조건 옳다고 말한 대신, 사회 전체의 고민을 요구했으니까요.

      저도 여러모로 미국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전에는 모델 출신 연예인 타이라 뱅크스가 자신의 쇼에서 “여러분, 우리의 삶은 매스 미디어에 세뇌당하고 있단 걸 알아야 해요”란 말을 하는 걸 보고 와, 대단하구나 싶기도 했고…… 하지만 그만큼 아이러니한 나라란 생각도 들어요. 타이라 뱅크스는 가장 효율적으로 매스 미디어를 이용하는 연예인이자 프로듀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미국이란 나라는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아놓는 나라이기도 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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