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는 나같은 오른쪽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가치다. 내 양심 하나 지키기 벅찬 순전한 개인주의자로서, 그들이 추구하는 연대를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연대를 그토록 목놓아 부르짖는 이들 중 또한 많은 이들이 유치할 뿐더러 독선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은 그 자신의 가치를 절대적 정의로 설정하고, 이에 반(反)하는 모든 의견을 ‘잠재우려’ 몸부림친다. 그들의 의견에 반하는 인간은 존재해선 안 되며, 만일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따르지 않으면 매도당하기 일쑤다. 홍세화 씨의 유행어를 빌려 쓰자면, 이 극도의 앵똘레랑스가 그들이 주장하는 연대 속에 존재한다.

어떤 운동권 치들은 아직도 술만 마시면 NL과 PD 얘기를 늘어놓을 정도로 구세대적이다. 구세대적 사고는 구세대적 모순을 낳는다. 그들은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적 문화와, 소위 주류가 자행하는 소수자에 대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술자리를 통해 운동권 후배를 ‘키우고’, 입만 열면 “투쟁”을 소리치며 자신들의 숭고한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려 몸부림친 것 또한 그들 자신이다.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거만한 표정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고,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가오’ 때문이라 당당하게 얘기하는 것도 그들 자신이다. 그들은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를 향해 분노를 퍼부으면서도 자신들의 부패에 대해서는 ‘사정상’이라는 이유를 갖다붙이며 지극히 관대해진다.

일전에 훌륭한 블로그 ozzyz review로부터 소수성과 소수자에 대한 글을 읽고 그 명료한 문제의식에 감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문제의 본질은 한참 빗나간 것 같지만,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묻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소수자다. 어떻게든, 어떤 형태로든지.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소수자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대신, 스스로를 주류와 다수의 틀로 묶고 다른 소수자들을 박해하는데 그 시간을 쏟는다. “들뢰즈를 인용하는 이진경 교수의 말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소수자들을 사회의 타자이며,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문제가 있는 이들로 설정함으로써 우리들을 주류, 다수, 동일자로 인식하려 한다. 그럼 운동권은 어떠한가?

새벽 4시에 이상한 문자가 왔다. 운동권 치들과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겠다는 분노 서린 문자다. 운동권 치들이 무슨 “국민의 권리”니 “민족적 사명”이니 하는 헛소리들을 늘어놓으며 결국 “정부는 무조건 악(惡)”이란 식의 논지로 “투쟁을 해야 한다”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동안, 그들 앞에서 그 헛소리를 고스란히 다 받아야 했을 그의 고충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결국 운동권 최대의 적은 우리 자신이 고스란히 계승한 구체제의 파시즘이란 얘긴가. 만일 그들이 자신의 정의를 끝까지 강요하길 원한다면, 나는 그 앵똘레랑스에 맞서 싸울 것이다. 야비한 이기주의자이자 정부 시책의 앞잡이로 평가절하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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