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결혼했다
박현욱(2006)
문이당

어차피 소설이란 환상을 그리기 마련이지만, 이 작품은 그 정도가 좀 심했다.

처음에는 소설이 말하는 다자연애/다자결혼(polyamory) 담론, 그 극한적인 이성 작용의 담론을 “까부수고” 싶은 생각에 소설을 집어들었다. 연장자이자 철학도이고, 평단으로부터 인정받은 진짜 문학가이기까지 한 ‘작가’에 대해 예의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가 한 언론 매체로부터 가진 인터뷰의 어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여전히 나는 다자연애/다자결혼의 신화를 숭배하지 않으며, 그 위대한 이성적 담론을 부정하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의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적어도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완전한 환상문학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두 명 뿐이라고 생각했다. 두 명의 남편. 아내는 없다. 사실 아내야말로 소설에 있어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 나가고, 사건을 일으키며 또한 사건을 봉합하기도 하는 핵심 인물이지만, 어째서인지 아내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는 연극적 소품이며, 기계신(Deux ex machina)이자, 다자연애/다자결혼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 같은 느낌이다. 소설 전체에서 그녀의 감정곡선이 직설적으로, 혹 은유적으로라도 표현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뿐이 아니다. 아내의 행동, 아내의 말, 심지어 아내의 눈물로부터도 그녀의 실존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내 눈으로 보기에, ‘아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드러나지 않는 액자다. “있을 법한” 일을 그린 게 아니라, 작가가 “상상해볼 만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50% 순도의 헛소리고, – 실은 작년부터 했던 소린데, 한국 평단의 취향을 잘 모르겠다. ‘어린애’인 와타야 리사의 소설에는 “아쿠타가와의 삽질”이라는 딱지를 자랑스럽게 붙이지만, 내 취향으로 와타야 리사의 상쾌한 청량감이나 독특한 은유가 그렇게 평가절하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반대 지점에서, <아내가 결혼했다>가 이렇게까지 극찬을 받는 이유도 실은 잘 모르겠다. (또한 물론, 평가절하해야 한다는 얘긴 절대 아니다.) 또 이 소설만의 특징은 아닌데, 왜 문학가들이 이렇게 ‘섹스’란 단어를 즐겨 쓰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 나는 또한 한 문학가의 일갈을 곱씹어보게 된다. 풀어 얘기하자면 이런 얘기다. 밥 먹는 장면을 굳이 글로 표현하려면 거기에는 고도의 함의가 있어야 한다. 밥은 누구나 하루에 세 끼씩 먹는다. 암만 먹는 것이 인생 최고의 낙이라지만, 하루에 180억번이나 벌어지는 일을 굳이 활자화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활자의 낭비 아닌가. 기실 섹스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이것은 (내게 부족한) 연륜과 수준의 차이일까, 아니면 단순히 취향의 차이일 뿐일까?

  하나의 댓글

  1. 사고의 깊이나 너비, 그리고 부지런한 글쓰기에 감명받고 훔쳐보다가 오늘 처음 댓글을 남깁니다. 친구에게 빌려 별 기대없이 읽은 소설이었는데, (우습게도 이런 경우에는 의외의 기쁨을 기대하게 마련인데) 아니더군요. 이렇게 가려웠던 부분을 긁어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런데 의외의 기쁨을 뒤늦게 찾았는데요. 친구들이랑 술자리에서 “그 책 읽어봤냐-”로 시작해 모노/폴리가미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기가 좋더라고요. 취중잡설에 좋은 안주거리입니다.

 댓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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